유적지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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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호국정신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 임진왜란 관련 행사나 승첩지 등 여러분의 역사의 현장체험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1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2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3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4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5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 지정번호 문화재 자료 제93호
  • 주소 사천시 대방동 250 
  • 전화번호 055) 831-2725 (문화관광과)
  • 홈페이지 사천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 지정일자 : 1983년 12월 20일 * 규모 : 4,658㎡ * 명확한 사료는 없으나 이순신이 거북선을 숨긴곳이라는 이야기가 있음 대방진굴항은 1983년 12월 20일 문화재 자료 제 93호로 지정되었다.이곳은 고려 시대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하여 설치한 구라량의 영이 있던 곳으로 수군만호가 있었다. 그 뒤 구라량이 폐영이 되면서 소규모의 선진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 시대 말 순조 때 비로소 이곳에 굴항을 축조하였다. * 연혁 - 고려시대 때 왜구 침범 방지를 위한 수군만호 설치 - 구라량이 폐영되면서 소규모의 선진으로 남아있다가 조선 말엽 재축조 - 1820년경 완공 - 1911년 한일합방과 함께 진영의 문서 소각 - 현재는 새로이 복원 선착장으로 이용 고려시대 말엽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倭寇)의 노략질을 방어(防禦)하기 위하여 지금의 늑도(勒島)에 구라량(仇羅梁 : 뒤에 仇良梁)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지켰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세종 때 구라량이 고성의 사도(蛇島)로 옮겨감에 따라 구라량은 폐영(廢營)이 되고 말았다. 그후 성종 19년(1488)에 새로운 삼천진(三千鎭)이 설치되어 삼천포의 근해를 방비하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지금의 용현면 선진으로 옮겼다가 다시 통영의 미륵산 아래로 옮겨 갔다. 그리하여 삼천포 근해가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순조(1801∼1834년) 때에 이르러 진주목 관하의 남해 창선도의 적량첨사(赤梁僉使)와의 군사연락과 왜구 방비를 위해 설치한 것이 대방선진(大芳船鎭)이다. 선진에는 병선의 정박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뚝을 쌓아 활처럼 굽은 만(彎)을 만들고 굴항(掘項)을 설치하였다. 이를 한편으로는 굴강(掘堈)이라고도 하는데, 둑을 쌓을 때 사용한 흙은 각산개의 백토를 날라와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의 선진에는 전함 2척과 300명의 수군병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굴항의 축조공사에는 진주관아 73개의 면민이 동便퓸?1820년경에 완공하였으며, 굴항 북편에는 수군장이 거처하는 동헌과 많은 관사들이 있어 수군촌(水軍村)을 이루었다고 하며, 또 잡곡을 포함한 환향미(還鄕米) 2만여 섬을 저장한 선진창(船鎭倉)도 있었다. 현재는 새로이 복원된 모습이고 주민들이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1832년의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창고조에 ‘재주(在州) 남 80리 말문면(末文面)의 선진창(船鎭倉)이라 한 것과 이 고장의 문인 노봉(魯峰) 김재식(金載軾)은 굴항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시제(詩題)가 ‘대방선진(大芳船鎭)’이었다고 한다. 굴항 서편에는 군인숲(軍士林)이 있는데 병사들의 휴식처이기도 했고 병사가 죽으면 가매장 하던 곳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