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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충절이 빛난 곳 의령군 지정면 기강(岐江) 나루, ‘보덕각과 쌍절각’

명예기자 마크 

[명예기자 손종현] 경남 의령군 지정면 기강로 383, 성산마을 강변을 따라 기강(岐江) 언덕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맞아 싸워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전국 최초의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첫 승전지 기강(岐江) 나루가 있다. 의령과 함안을 북과 남으로 가르며 서쪽에서 흘러온 남강 강물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강변을 따라 기강언덕에 전공을 기리기위해 세워진 보덕각과 쌍절각강변을 따라 기강언덕에 전공을 기리기위해 세워진 보덕각과 쌍절각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역으로써 남강의 건너편에는 함안군 대산면이, 낙동강 건너편에는 창녕군 남지읍이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이 지역은 청정지역으로 일조건이 매우 좋으며 수박재배의 아주 적합한 토질로 시설수박의 최대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겨울철 수박을 재배하는 하우스겨울철 수박을 재배하는 하우스 


또 기강나루는 의령군에 있던 여러 곳의 나루 중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으로 '거름강'이라 불렸다. 예전에는 주막과 가정집 한채, 의령에서 창녕 남지로 가는 주요 나루터였다. 50여 년 전의 나루터에는 남지로 배를 타고 등하교하는 학생, 농사를 짓어 물건을 팔로 남지장을 오가는 장사꾼 등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룻배, 외딴집 등 인적은 온데간데없고 강물만 속절없이 무심히 흐르고 있다.

 

기강나루에서 굽어보는 남강의 자연이 아름답다
기강나루에서 굽어보는 남강의 자연이 아름답다

기강나루에서 본 남지철교기강나루에서 본 남지철교

낙동강과 남강이 합치는 거름강
낙동강과 남강이 합치는 거름강

 

남강의 마지막 샛강으로 이어지는 봉곡천과 두곡천이 남강 물길에 닿는 곳이며 기강로가 비스듬히 굽어지는 길모퉁이쯤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보덕각(報德閣)과 쌍절각(雙節閣)이 나란히 있다. 모두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66로 지정되었다.(의령군청 정보제공) 

 

붕어낚시터로 유명한 봉곡천붕어낚시터로 유명한 봉곡천 


남강으로 이어지는 두곡천남강으로 이어지는 두곡천

 

보덕각의 주인공은 임란왜란 때 나라 안에서는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른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망우당 곽재우(1552~1617) 장군을 기리는 것으로, 1간(間) 팔작(八作) 기와지붕으로 된 이것은 1739년 영조 때 세웠다.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 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 보덕불망비(報德不忘碑)'라 적혀 있다. 

공덕을 갚고 또 잊지 않겠다는 임금의 다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과 달리 정암진 전투보다 기강나루 전투를 더 크게 쳤나 보다. 첫 승전이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마음속에 피어난 희망이었던 것이다. 

 

보덕각 안내판보덕각 안내판

 

앞에서 뒤로 돌아가면 곽재우의 행적을 적은 글씨가 빽빽하다. 왼쪽면을 보면 곽재우 장군과 함께 싸운 열일곱 장수가 새겨져 있다.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린 곽재우는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의령군 유곡에서 사재를 털어 도망가는 관군에 분노하며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전국 각 지역 의병 결성의 도화선이 되었다.

 

곽재우의 활약은 이미 정암진 전투에서 밝힌 바 있지만 이곳 기강나루에서도 그가 구사한 전술은 놀랍기만 하다. 곽재우는 기강언덕에 미리 의병을 매복시키고 낙동강의 수로를 따라서 이동하는 왜군 선단(船團)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먼저 수로 길목마다 물 밑으로 나무막대를 세워 왜선의 진로를 막았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첫 승전지 기강전적지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첫 승전지 기강전적지


첫 승전지인 기강나루 옆에 세워놓은 보덕각첫 승전지인 기강나루 옆에 세워놓은 보덕각 

 

그리고 매복병을 풀어 급습, 왜군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한다. 이 기강나루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이고 또 왜군이 이곳의 수운을 이용하여 보급을 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을 지나는 왜군의 선단을 이 기강에서 차단함으로써 왜에 큰 타격을 주었다는 의의가 있으며 후에도 기강에서의 전투는 수차례 있었다. 

 

또한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의령을 거점으로 성주, 합천, 창녕 등지에서 닥치는 대로 왜적을 쳐부수고 구국의 선봉이 되었다. 

보덕각(報德閣)은 곽재우 장군의 공로와 그의 덕을 기린 불망비(不忘碑)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보덕각에 있는 보덕불망비보덕각에 있는 보덕불망비 


그 옆 쌍절각은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후지당(後知堂) 손인갑(孫仁甲) 장군과 손약해(孫若海)의 충절을 기리는 것으로 광해군 때 세웠다. 

 

손인갑과 손약해의 충절을 기리는 것으로 광해군때 세운 쌍절각손인갑과 손약해의 충절을 기리는 것으로 광해군때 세운 쌍절각 


손인갑장군과 그의 아들 손약해 부자의 충절 기리는 비석손인갑장군과 그의 아들 손약해 부자의 충절 기리는 비석 


이름에 '쌍'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비각은 두 분을 기려 세워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현지 안내판은 '이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절한 손인갑(孫仁甲)과 그의 아들 손약해(孫若海)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려'라고 해설한다.

 

쌍절각의 안내판쌍절각의 안내판 


손인갑(1544~1592)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원첨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의 의병부대에 합류,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실질적인 군지휘 책임자로서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하였다. 

 

정인홍과 더불어 성주, 무계, 현풍, 초계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는 '그 전과를 인정받아 동래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그해 6월 말에 있었던 합천 초계(草溪) 마진전투(馬津戰鬪)에서 특출한 전술을 구사, 낙동강을 거슬러 무기와 물자를 보급하던 왜선단(倭船團)을 모조리 격파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아나던 왜군을 뒤쫓아 적들을 섬멸하며 가던 중 말이 모레펄 진흙에 빠지는 바람에 그만 강 가운데 모래 진흙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애마와 함께 전사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들 손약해 또한 '부친의 전사 소식을 듣고 부친의 원수를 갚으러 나머지 병사를 수습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들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전후에 향리의 유생들의 상소로 판결사(判決事)에 추증되고 쌍절각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손인갑은 선조(宣祖)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후에 이들 부자의 충절을 기리는 의미에서 쌍절각(雙節閣)을 세운 것이다. 당초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지금의 봉수면 신현리에 세워졌던 것을 그 뒤 1943년 5월에 장군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거의 끝낸 산수유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거의 끝낸 산수유

쌍절각과 보덕각을 일리는 빗돌쌍절각과 보덕각을 일리는 빗돌

 

바쁜 일상생활에서 탈피하여 한번쯤은 연인, 가족단위로 힐링도 하면서 충의의 고장 의령 남강변을 찾아 한겨울 그 추위를 견디고 산수유, 버들강이지가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거의 끝낸 이 좋은 계절에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바친 호국의병들의 숭고한 얼을 되새겨 보는 일도 뜻깊은 일이라 생각한다.

 

<< 교통안내 >>

1. 대구,부산,마산방면 : 남해고속도로 내서 IC → 칠서 → 함안 대산 → 지정 → 기강나루

2. 대구,부산,마산방면 : 남해고속도로 함안 IC → 법수 → 정곡 → 지정 → 기강나루

3. 진주방면 : 남해고속도로 의령 군북 IC → 의령 → 국도 20번 이용 → 정곡 → 지정 → 기강나루

 

명예기자 손종현 

의병의 충절이 빛난 곳 의령군 지정면 기강(岐江) 나루, ‘보덕각과 쌍절각’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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