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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무거운 삶 위로해준 벗, 그 무엇도 아깝지 않다

절뚝거리거나 한쪽 발로 껑충이며 일어서야 하는 노인이 통영 쌍새미 길 끝, 슬레이트집에 홀로 살고 있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동그란 눈은 노안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어색함, 어려움이 복잡하게 얽힌 눈이다. 1918년생, 94세, 잡은 손에서 약한 맥박을 느꼈다.

75년 전, 열여덟 통영 소녀는 거제도 장승포 고모 집으로 간다며 강구안을 찾았다. 돛단배를 타고 강구안을 벗어나면 지척에 있는 고모집 장승포. "돈 더 벌게 해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장정 두 명에게 끌려 장승포행이 아닌 부산으로 가는 발동선에 태워졌다. 저항했지만 소녀는 장정을 이길 힘이 없었다. 당시 소녀는 어머니와 함께 그물 공장에 다녔다. 나중, 같은 그물 공장에 있던 조선인 '계술'이란 남자가 자신을 '업자'에게 소개했다는 것을 알았다.

열여덟, 조숙했던 통영 소녀는 고모집 장승포가 아닌,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중국 대련과 대만, 필리핀에서 소녀는 쓰러졌다. 지켜주지 못한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름은 김복득. 통영 태평동에서 태어났다. 나자마자 집안 살림이 불어 딸이 복덩이라며 아버지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12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녀는 인물이 좋아 동네 총각들이 많이 따랐다. 슬쩍 손이라도 잡으려 하면 탁, 털어버렸다고 새침데기라는 뜻의 '털지'란 별명을 가진 소녀였다.

소녀는 중국 대련에서, 대만과 필리핀에서 한 명이 누울 수 있는 방, 그 좁은 '판잣집'에 갇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군인들의 줄을, 구십 넷의 나이, 7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했다.

"일렬로 그렇게 줄을 서서……."

고향에서 소녀는 남자와는 말 한마디, 스치는 손끝마저 부끄러워했었다. 스물 여섯까지, 그녀는 8년을 제국주의에 강간당했다. 많은 소녀가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를 받았다. 임신한 위안부는 총살됐다.

한 일본인 장교가 그녀를 사랑했고 일본에서 함께 살자고 했다. 그에게 어머니와 동생이 보고 싶다며 간청했다. 1년 뒤 그 일본 장교 덕분에 해방 직전 배를 탈 수 있었다. 탈출 당시 잠수함에 선미가 폭격당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나가사키 항에 도착, 고향을 향했다.

동생은 징용 가고 없었다. 딸의 행방을 모르는 어머니는 술찌끼를 먹고 돌아오기 몇 개월 전 부종 병으로 돌아가셨다.

고향은 그녀를 '잡년'으로 손가락질했다. 해방 후 위안부 삶을 접게 해준 일본군 장교가 통영으로 찾아왔지만 조선 여자가 일본으로 갈 수 없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미군정 당시 배급을 타 먹고살았고, 홀몸으로 한국전쟁을 겪었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결혼했지만, 아버지뻘에 본처까지 있는 사기 결혼, 둘째 아내로 살아야 했다. 결혼식도 없이 같이 살았던 남자를 그녀는 지금도 남편이 아닌 "그 남자"라고 부른다. 두 번 유산했고 이후 임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나이 40에 그 남자는 숨졌다. 낮에는 통영 중앙시장에서 생선을 팔았고 저녁엔 새터시장에서 다시 생선을 팔며 연명했다.

1994년, 위안부 삶을 숨기고 산 지 근 50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몸을 드러냈다. 수차에 걸친 조사와 녹취, 증언 때마다 부끄러움에 횡설수설했다. 나이가 들수록 하나 둘 더 구체적 사례를 밝혀 갔다. 하지만, 이제, 그 분노도 치매로 하나 둘 잊혀간다.

2007년 9월, 증언 집회와 교류회를 위해 귀국 후 처음 일본을 찾았다. 일본은 원수란 생각뿐이었다. 그때 집회를 본 한 일본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울며 용서를 빌 때 잠깐 위안이 됐다.

위안부 등록 후, 정부 지원금을 받는 생활보장대상자가 됐다. 집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15만 원, 매일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다리를 절며 쉬며 아무도 없는 곳, 집으로 스며들었다. 지난 3월 한 달, 8800원짜리 케이블TV 시청료를 내고 2만 8900원의 전기료를 냈다. 고혈압·신장약·골다공증 약이 유일한 친구가 된 듯했다.

"죽기 전에 일본 사과를 받아야 해, 그래야 눈을 감지…." 함께 절규했던 같은 위안부 피해자(통영 5명, 거제 2명)들이 줄줄이 떠나갔다.

그녀는 "부끄럽지만…"이란 말을 종종 하면서 위안부 삶을 증언했다.

삶은 무겁고 외로웠다. 수년간 통영여고 학생들이 집 안 청소도 하고 말벗이 되어줬다. 가진 걸 모두 주고 싶었다. 정부 지원금을 모은 돈, 전 재산 2000만 원을 장학금으로 통영여고에 30일 오후 3시 기부했다.

태어날 때부터 흥이 많았던 그녀는 며칠 전(27일) 신명이 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통영 열방교회,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창립 10주년 후원의 날 행사장이었다. 다 준다고 생각하니 기뻤던 모양이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면, 한 많은 내 삶, 집채 덩어리만큼도 클기라…."

이야기 막바지, 그날 일이 생각난 할머니가 앉은 채 방안에서 팔을 올리고 다시 덩실덩실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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