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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는 이상주의자, 연극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경남, 나아가 전국에서 연극을 하는 이들에게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연극인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가장 많은 답변으로 돌아오는 이가 있다. 바로 밀양연극촌 이사장이자 지금도 연극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윤택 선생이다.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윤택 선생을 비유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고, 연출가 이전에 전직 기자 출신이자 문화평론가, 시인, 극작가, 연출가, 예술감독, 무대감독까지 그를 설명하는 직함도 다양하다. 1억 배우 오달수, 악역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해 최근 영화 <곡성> 주연까지 맡으며 연기스펙트럼을 넓힌 영화배우 곽도원, 여배우 이민정 등이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하는 연출가 이윤택. 그를 지난달 3일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기간 밀양연극촌에서 만나봤다. 연극이 너무 하고 싶었어 이윤택 선생이 연극과 첫 인연을 맺은 지 4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연출된 창작연극만 100편이 넘는다. 작가로서 글을 쓰고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해 만들어진 연극은 약 300편에 이른다. 이윤택 선생은 "연극이라는 것에 매료돼 살아왔다. 그동안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지만 내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도민일보20160909이윤택감독1 이윤택 감독.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을 안긴 것은 1972년이다. 당시 반년 이상 준비했던 연극이 폭삭 망했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돈을 모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는데 당시 시대가 뒤숭숭한 상황에서 표 값은커녕 대관료까지 낼 돈이 없어 도망치다시피 하며 극장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극장 직원들이 돈을 다 받아갔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현실이라는 벽에 처음으로 부딪혔다. 이후 연극계에서 몇 차례 연극에 더 참가했지만 현실에 타협하면서 '잠시만 안녕'을 외쳤다. 군에 갔다가 가정형편 때문에 일찍 제대한 청년 이윤택은 집이 어려워진 뒤 연극은 못하고 경상권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보름을 공부해 공무원이 되서는 부산우체국에서 일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직장을 관뒀고 마산 양덕동에 있던 한일합섬 염색공장, 밀양에서 한국전력 주임, 부산 화력발전소에 이어 부산일보 기자로 살아갔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이윤택 선생은 책과 음악을 즐겼다. 음악다방에 가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서점에서 시집을 보거나 책을 사 보았다. 기자가 된 뒤에는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당시 기자는 지금이랑은 달리 대우가 좋았어요. 월급도 많았고 연극쟁이로 살 때보다 훨씬 풍족했습니다. 세상에 순응하는 내 모습이 익숙해졌었고. 물론 그러면서도 1979년에 희곡작가로 데뷔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연극을 떼 놓고 살기는 어렵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해진 옛 학교 친구 영화배우 하재영을 만났다. 친구를 보고 반가워야만 했는데 반가운 마음 한쪽에는 부러운 마음이 공존했다. 그러다 친구의 말 한마디가 그를 깨웠다. "연극, 계속하지?" 친구의 질문 한 마디에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꼭,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1986년 1월, 사직서를 제출했다. 물론 사직서가 수리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신문사가 그래도 의리가 있었어요. 그만둔다니까 부장부터 국장, 이사, 대표까지 말리더라고요. 신문기자 그만두고 연극을 다시 하겠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직서를 냈고, 설득했습니다. 아내에겐 연극이 아니라 글을 쓰겠다고 설득을 했어요. 뭐 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벌었던 돈은 든든한 자금이 됐고, 그간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쌓은 경험은 연극을 위한 아이디어가 됐다. 회사를 박차고 나온 뒤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그 시작이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극단이자 믿고 보는 이윤택의 연희단거리패의 출발이었다. 도민일보20160909이윤택감독2이윤택 감독.

연희단거리패 서울, 부산 아닌 밀양으로 "연출가 이윤택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연희단거리패는 부산일보 기자를 그만둔 뒤 이윤택 선생이 1986년 창단했다. 자체 가마골 소극장을 중심으로 <죽음의 푸가>, <히바쿠샤>, <산씻김>, <시민K> 등 일련의 상황극을 올리면서 연극 양식을 갖춘 실험극단으로 성장했다. 연희단거리패를 만들고 지금껏 많은 배우, 스텝이 그의 밑에 있었고 독립했다.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배우 유인촌, 전 환경부 장관 손숙이 그와 함께 일을 했고, 영화계 1억 배우 오달수, 곽도원, 이민정도 연희단거리패에서 이윤택 선생과 함께했다. 1988년부터 서울 공연을 시작한 연희단거리패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1999년 정동극장에서 내놓은 연극 손숙 주연의 <어머니> 공연에 전 이상조 밀양시장을 비롯한 밀양시 교육장과 밀양시의원들이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 그 자리에서 이윤택 선생은 "밀양으로 갈 테니 폐교 하나만 주십시오"하고 요청했고 연희단거리패는 밀양연극촌으로 향하게 된다. 구 월산초등학교는 우리극연구소 밀양연극촌으로 재탄생했다. 연고도 없는 밀양이었다. 다만 연출가가 아닌 다양한 직업을 전전할 때 있었던 곳이 밀양이었지만.
도민일보20160909이윤택감독3이윤택 감독.
이윤택 선생은 밀양으로 온 이유를 총 4자리로 들었다. "우선, 문화가 꽃피려면 인구가 10만 명 이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 아비뇽 연극축제나 에던버러 페스티벌이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인구가 적지만 알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다음 문화적 자긍심이 지역에 필요합니다. 밀양은 스스로 양반을 자처하는가 하면 유학과 불교가 함께 공존하는 문화가 꽃핀 곳이거든요." 그 밖에 밀양이 자연풍광도 뛰어난 점과 마지막으로 교통 편의를 생각했다. "문화예술이 성공하려면 결국 교통이 좋아야 해요. 그래서 서울 위성도시는 안된다는 게 제1원칙이었어요. 그렇다고 서울과 너무 멀면 그것도 쉽지 않은 선택지고. 밀양은 거리가 멀긴 하지만 울산, 부산, 경남이 가깝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도 오래 걸리지 않아서 선택하게 된 이유입니다." 밀양에 도착한 뒤 올해로 17회를 맞은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기획했다.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첫해 밀양시에도 알리지 않았다. 당연히, 경남도, 정부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입소문을 통해 흥행에 성공했다. 첫해 당시 예산이 부족해 후배들에게 100만 원씩 쥐여주며 도움을 청했고 후배들은 흔쾌히 도움을 줬다.
도민일보20160909이윤택감독4이윤택 감독.
첫해 축제가 성공리에 마친 뒤 이듬해부터 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이윤택 선생은 축제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한 가지 철칙을 지키고 있다. 바로 축제예산은 축제예산으로만 활용한다는 것. "관에서 돈을 받는 건 세금을 받아쓰는 것이지 않나요. 축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라고 준 세금인 만큼 허투루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도민일보20160909이윤택감독6이윤택 감독.
나는 이상주의자다. 그래서 연극을 한다 연희단거리패의 가장 큰 특징은 단원 모두가 함께 합숙을 한다는 것이다. 단원 모두가 함께 웃고 울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윤택 선생은 연희단거리패 단원 80여 명이 왜 합숙을 하는지 설명하며 웃는다. "제가 혼자 사는 걸 싫어합니다. 외롭고 심심해요. 그래서 합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연극에 빠져든 이유를 전했다. "삼대독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노는 걸 좋아했지만 또래 형제가 없어 외로움을 많이 탔습니다. 사랑도 우정도 모두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극은 서로 합의를 봐야 하니 하는 만큼 당시에는 그 어떤 이보다 애틋하게 만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연극이 아주 좋아요. 그때만큼은 행복하니까요." 행복하고자 연극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윤택이다. 그는 신문기자를 하면서도 암울했던 사회상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도민일보20160909이윤택감독5이윤택 감독.
당시는 광주·부마사태 등 격동기였다. 신문기자로서 온 힘을 기울여 기사를 썼다. 그러다 군사독재와 뜻을 같이하는 3당 통합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지켜보며 지식인들의 변화를 보고 괴리를 느꼈다. 그래서 더 연극에 몰두했다. "연희단거리패를 만들 때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판 남사랑패가 되자. 유랑극단이 되자고. 신나고 행복하기 위해 연극을 하자고." 이윤택 선생은 시인, 평론가, 연출가, 극작가, 전직 교수, 예술감독 등 다양한 명함을 지니고 있다. 그중 가장 원하는 직업은 역시 연출가였다. "비평가, 평론가들은 사실 자기방어적 입장에서 글을 많이 쓰고, 교수는 한 번 사람들을 가르쳐보고자 해본 거예요. 예술감독 역시 세상이든 뭐든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하고 했습니다. 근데 해보니 바뀌지가 않더라고요." 현실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회의적인 사고가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서 연극이 더 매력적이었다. "예술의 기능에 대해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예술이란 부조리함 속에서도 삶의 이유를 찾는 거라 봅니다. 정당성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에요. 전 이상주의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정당성을 제시하고 싶습니다."이다. 난 이상주의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정당성을 제시하고 싶다." 당당한경남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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