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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시(詩) 쓰는 경찰관 '희망의 습작'은 계속된다

시집 두 권을 들고 활짝 웃어 보였다. 이야기 도중에는 간간이 눈시울을 적셨다. 다시 마지막에는 '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며 미소 지었다. 경남경찰청 정보화장비과에 근무하는 박종득(58) 경위는 "모처럼 옛이야기를 해본다"며 굴곡 많은 지난 시간을 담담하게 끄집어냈다.

통신분야 전문가

박종득 경위가 근무하고 있는 경남경찰청 정보화장비과는 '통신', '장비'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박 경위는 30여 년 경찰 생활 대부분 통신분야를 맡았다.

도내 경찰이 사용하는 무전기·업무조회기 등 1만 개 넘는 무선기기 전체를 관장하는 일이다. 수리하는 일 또한 포함해 있다. 아침에 출근하면 도내 전체 112시스템을 확인한다. 도내 23개 경찰서 서버에 이상 없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또한 집회 현장에서는 무전이 필수이기에 이를 관리하는 것 또한 중요 업무다.

"싱크로나이즈 선수가 얼굴은 웃고 있지만 물 아래서는 발을 엄청나게 움직이잖아요, 제가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매일 알게 모르게 점검하고 지원하는 업무죠. 1987년 첫 발령지가 경남경찰청 정보통신담당관실 무선정비실이었습니다. 무전기 시설이 거의 없던 시절입니다. 15명이 도내 전 파출소를 다니며 설치하는 작업에 구슬땀을 흘렸죠. 무선통신 기술이 있다 보니 한번은 도지사 관용차량에 전화기를 설치하러 갔습니다. 잘못하다 기름탱크를 건드려서 차를 못 쓰게 될 뻔했죠. 지금이야 웃지만 그때는 등골 오싹했습니다."

도민일보20160804박종득경남경찰청정보화장비과장2박종득 정보화장비과 경위.

창원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몸이 왜소했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징용으로 골병든 것이 이유일 것이라 받아들였다. 체격이 작다 보니 시비 거는 친구도 많았다. 육상·태권도·럭비 등 운동을 닥치는 대로 했다. 군인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학 진학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경남직업훈련소에 들어갔는데 '통신전자'를 전공분야로 택했다. 강렬했던 기억 때문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미군 부대서 얻은 무선마이크가 있었습니다. 선이 없는 물건에서 스피커를 타고 소리 난다는 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건 정말 획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고 꼭 배워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거죠."

그는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책을 놓았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 2000년 창원기능대학(현 한국폴리텍 7대학) 전자과를 졸업했고, 무선설비 기사 등 5개 자격증을 땄다. 경찰 조직에서 하는 통신 관련 각종 경진대회 수상 경력도 당연했다.

아내, 그리고 아내

박종득 경위는 경찰 생활을 해경에서 시작했다. 4년간 근무하다 일반경찰로 옮겼다. 모든 이유는 아내에게 있다.

"1977년 친구 소개로 집사람을 만났습니다. 늘 책을 들고 다니더군요. 그 모습에 반하게 됐죠. 알고 보니 세상에서 제일 책을 안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나한테 잘 보이려고 양장본을 들고만 다녔던 거였죠. 하하하. 군대 다녀온 후 1981년 8월에 결혼식을 올렸죠."

이듬해 첫 아이를 낳았다. 이후 아내는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고 했다. 병원을 찾았더니 류머티스인데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고 했다. 약도 제대로 처방해 주지 않았다. '돌팔이 의사'라 욕했지만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내에게 도움될 만한 건 모두 찾아서 먹였다. 현실적인 문제 또한 가로막고 있었다.

"전 국민 의료보험 시행 전이었습니다. 치료비 감당이 안 되더군요. 의료보험 혜택이 너무 절박해서 알아보니 해양경찰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곧바로 시험 준비해서 합격한 거죠. 남들처럼 투철한 국가관·직업관 때문이 아니라 아내 병원비를 위해 입문한 셈이죠."

해양경찰이다 보니 경비정 타고 먼바다 나갈 일이 많았다. 일주일씩 집을 비우는 건 예사였다. 아내를 보살펴야 했던 그로서는 다시 결심해야 했다. 1987년 사표를 던진 후 일반경찰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도민일보20160804박종득경남경찰청정보화장비과장1박종득 정보화장비과 경위.

그렇게 아내를 위한 삶을 이어오던 중, 또 한 번 청천벽력같은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2013년 아내 자궁 쪽에 암이 발견됐습니다. 수술했지만 몇 달 후 암세포가 퍼져 머리카락이 다 빠질 정도였습니다. 재수술하면서 장기도 많이 제거했죠. 이후 항암치료 하는데 산 사람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내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의사가 포기하면 신이 있고, 신이 포기하면 내가 있다. 내가 절대 안 보낸다'고 말이죠."

현재 아내는 여전히 그를, 그는 여전히 아내 곁을 지키고 있다. 3년 전과 비교하면 그래도 감사한 지금이라고 한다. 두 딸 모두 결혼해 오로지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매일 아침 5시 10분에 일어나면 아내 물을 먹이고 찜질해 주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그리고 108배를 잊지 않는다.

"아내가 차려주지 않으면 밥을 안 먹습니다. 매정한 것 같지만 아프다고 가만히 두면 더 무기력해집니다. 아내 스스로 하게끔 힘을 키워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나 스스로를 늘 참회하고, 대자연을 향해 빌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 주고, 신이 있으면 헤아려 달라'고 말이죠. 아내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내에게만 원인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연을 맺은 저한테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시인 박종득

박종득 경위는 시인이다. 2004년 한국문인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머물지 않음은 떠남이리라> <못다 부른 노래> 두 권을 냈다.

"나이 들면 들수록 향기나는 분야가 어딜까요? 예술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그러하고요. 인생 2막을 즐거운 향기로 장식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서툰 발자취도 남기고 싶었고요. 그렇게 습작을 시작하게 된 거죠."

시인 채수영은 '시인 박종득'에 대해 '봄 이미지 시인, 정적인 시인, 자연의 조화를 아는 순수자연시인'이라고 평했다.

박 경위는 직원들과 바깥나들이를 가면 그 분위기에 걸맞은 시를 읊어준다.

현재도 틈틈이 글을 쓴다. 하지만 10여 년 가까이 시집 발간은 멈춰있다.

"새 시집을 낼만큼 써놓은 글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정신이 없습니다. 집사람이 아프기도 하고…."

그는 대신 아내를 담은 시 하나를 소개했다. 제목은 '류머티스'다.

불청객의 방문으로/새벽은 비상이다/꼭꼭 걸어 잠근 문/어디로 들어 왔단 말인가/보일러 온도만큼/문지방을 드나드는 횟수만큼/아내의 아픔도/나의 안쓰러움도 높아간다/데운 수건을 들고 오가기를 한참/겨우 내쫓고/눈을 붙이는 아내/하루가 열리고/해 구멍이 찢어지면/어김없이 다시 찾아온다/바보가 되어가는/나의 아침/후줄근한 출근길/자꾸 뒤가 돌아 보인다/눈에 밟힌다

자신도 암을 이겨내다

참 얄궂은 일이었다. 박종득 경위는 어느 날 자신에게도 병이 찾아온 걸 알았다. 암이었다.

"2006년 업무 때문에 고성을 찾았다가 절 아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주인이 '당신은 수술하면 죽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소린가 했죠. 1년 후 병원에 갔는데 위암이라더군요. 못 미더워 부산백병원에 갔지만 마찬가지 대답이었습니다. 그때 기분은 뭐랄까, 연한 풀을 삶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 생명은 내가 살리기로 했습니다. 수술을 선택하지 않고 고성 식당에서 만났던 기인을 다시 찾았습니다. 구지뽕 같은 것으로 만든 약을 지어주기에 먹었습니다. 그사이 휴가 한번 안 내고 일도 평소처럼 했습니다. 100일 후 병원에서 CT를 찍었는데요, 위가 어린아이 것처럼 깨끗해져 있었습니다. 의사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때 참 많이 울었습니다…."

이제는 '힐링코드'라는 건강법으로 자신과 아내를 돌보고 있다. 한 목사가 10여 년간 우울증을 앓던 아내 병을 고치고자 노력한 끝에 찾아낸 치유법이다.

"사람을 이루는 건 몸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합쳐진 것입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은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운동장에 나가 힐링코드를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도민일보20160804박종득경남경찰청정보화장비과장3시집을 들고 있는 박종득 정보화장비과 경위.

그는 2018년 퇴직 후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기 위해 틈틈이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희망을 놓아버린 사람들에게 손 내미는 일도 일상적으로 하고픈 마음이다.

"영혼이 힘든 사람이 있다면 안내해 주고 싶습니다. 건강이 힘든 사람에게는 음식으로 치유하는 방법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능력만 된다면 약값도 베풀고 싶네요."

그가 쓴 시집에는 네잎클로버 여러 개가 꽂혀 있다. 평소 네잎클로버가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온다고 한다. 녹록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긍정의 힘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술자리에서 하는 건배사가 있다고 한다.

"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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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쓰는 경찰관 '희망의 습작'은 계속된다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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