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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탐방

[체험&탐방]산청 한센인 마을 '성심원'

유의배 신부, 개원 60년의 의미를 말하다

 


 

단절의 땅, 육지 속 외딴섬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이 찾았던 산청 경호강 너머 이곳은 발을 딛는 순간 세상과는 단절해야 했다. 6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누구나 오고 갈 수 있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세계에서 지내는 한센인마을 성심원. 그들과 함께 살아온 한국명 유의배(74) 신부를 만나기 위해 산청읍 성심원을 찾았다.

 

그들만의 외로운 섬 성심원

산청읍에서 6km를 달려 지리산 자락 경호강 강가에 이르면 성심원이 보인다. 지난 1959년 한센인 60여 명과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가 만든 한센인 마을이다. 진주 구생원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이주해 온 한센인들은 직접 흙과 돌을 나르며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한센병은 나균을 발견한 노르웨이 의사의 이름을 딴 만성 감염성 질환이다. 지금은 한 해 5명 정도에 불과하고 약으로 완치된다. 그러나 50~60년 전 상황은 달랐다. 안면기형과 신경손상 등 외형적 혐오감이 강했고 환자들도 많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나병보다 문둥병으로 불리며 사회적 냉대와 멸시를 받았다. 심지어 하늘이 내린 형벌, 천형이라고까지 했다. 환자들은 사회와 격리된 집단촌에서 숨어 지내는 형국이었다.

통합 부원장인 신현재 라이문도 수사는 치료약이 없던 시절 흉측한 외모 탓에 매일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가라고 아우성이었어요. 그나마 여기는 강을 건너야 했기에 주민들이 쉽게 찾아올 수 없었어요. 그래도 한센인들은 낮에는 산에 숨고 밤늦게 내려오는 힘든 삶을 반복했어요라며 아픈 역사를 말했다. 성심원 앞 경호강이 당시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신 수사는 다리가 없었을 때는 나룻배나 철갑선을 타고 다녔죠. 그리고 다리가 세워진 후에도 한참 동안 다리 입구에 초소가 있었어요. 성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방문 이유를 말한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어요라며 세상과 단절된 성심원의 실상을 기억했다. 성심원을 세상과 이어준 다리는 1972년에야 처음 세워졌다. 현재는 3번째 다리다. 홍수로 2번이나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한때 한센인 600여 명이 살았던 이곳은 신약 개발과 편견 해소 등으로 현재 57명이 지내고 있다. 한센인 생활공간 성심원과 중증장애인 70명이 지내는 성심인애원으로 분리되어 있다. 1995년 정부로부터 사회복지시설로 인가를 받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경남 한센인의 대부 유의배 신부

스페인 게르니카 출신인 유의배 신부가 성심원에 상주하기 시작한 해는 지난 1980, 올해로 40년째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한센인과 함께 보냈다. 지금도 한센인의 손을 잡아주는 인사법은 여전하다. 문둥병이라 부르던 시절에도 그는 그렇게 인사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보고 듣는 것이 약해요. 말로만 인사하면 잘 모를 때도 있어 먼저 만지면서 악수하고, 안아주면서 뽀뽀하면서 인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사랑하니까. 내 가족처럼.”

물론 그들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은 상처를 알기에 그는 상처 난 피부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다가갔다. 함께 밥을 먹고 힘들면 안아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하며 그들의 가족이 되었다.

유 신부가 운전면허증을 딴 것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눈총을 받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한글을 완전히 익히지 못해 필기시험 문제를 이해하는 것마저 힘들었지만, 그래도 두 번 만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유 신부는 한국의 운전면허증이 꼭 고등학교 졸업장처럼 귀하게 느껴진다고 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또한 한센인 가족이라는 편견 때문에 소외당하지 않도록 자녀들의 학교행사에도 참여하고 진로 상담까지 맡는 등 한센인 자녀의 아빠이기도 했다.

한센인 자녀와 손자들이 추석, , 휴가 때 찾아오면 너무나도 반갑고 좋아요. 나도 그들의 가정에 들어가서 가족이 된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유 신부는 지난 2014년 이태석 봉사상도 수상했다.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유 신부는 그들과의 삶이 행복하고 감사하지만 아직도 편견은 남아 있다며 아파한다. 실제로 얼마 전 성심원을 방문했던 한 여성 분이 유 신부와 악수를 거절했다.

제가 한센인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을 만졌다는 것 때문이었죠. 충격이었어요. 한센인들은 음성 판정을 받은 완치자예요. 아직까지 그런 편견이 있는 것에 놀랐어요.”

한센병 완치법이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한 편견은 한센인들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한다.

한센인들의 장사를 치러야 했던 유 신부는 지난 1997년부터 직접 염을 시작했다.

한센인들이 돌아가시는 걸 많이 봤어요. 임종 후 종교 의식 사이에 염도 있어요. 어느 날 밤 장의사가 오지 못해 자원봉사자와 함께 염을 했는데 큰 은총이었어요. 염을 하면서 다른 느낌이었어요. 그 사람의 일생, 고통을 알기 때문에 아주 좋은 일이 됐어요.”

 

부모님 임종 못지켜 아픔으로 남아

그런 그가 정작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5개월 동안 어머니를 간호했어요. 웬만큼 회복되셨을 때 한국으로 돌아왔죠. 그런데 일주일 만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께서 제가 당신보다 한국 사람들을 더 사랑한다고 말을 하셨다고 전해 듣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유 신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임종 다음 날에야 스페인에 도착했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한센인의 친구로 불리며 한결같이 그들과 함께 살아온 유의배 신부. 앞으로도 그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유 신부의 바람은 그의 방에 걸려있는 액자의 글귀처럼 두려울 것이 없는 듯 보였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세상이 성심원이 되길 소망한다

성심원은 2012년부터 성심인애대축제라는 행사를 마련해 지역사회와 소통한다.

신 수사는 평소 한센인 시설에 올 기회가 없는 분들이 축제를 통해 방문할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센인들도 지역민과 소통하고 인간관계가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죠라며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성심원을 찾았고 그만큼 그들의 편견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또한 한센인 모두에게 노후를 보내고 싶은 곳으로 성심원이 인식되기를 바란다는 소망도 밝혔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요양시설을 찾는 것처럼, 밖에서 살던 한센인도 노후에는 성심원처럼 편안히 지낼 시설이 필요해요. 한센병을 앓았다는 사실 때문에 요양원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한센병 병력을 숨기고 들어가서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하니 너무 슬픈 일입니다.”

한센인 마지막 세대가 모두 여생을 마칠 때까지 마음 편히 지내고 보살필 수 있는 사회가 성심원의 바람이다.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길 바라는 성심원. 그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배해귀 기자  사진 김정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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