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섬진강변 추령천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산길을 걸어 등하교하던 습관이 홀로 산을 오르는 특기이자 취미가 되었다. 젊은 날 산행을 하며 만났던 자연은 삶의 스승이 되었고 추억이 되었다. 산들이 유연하게 춤을 추는 곡선미에 반했고 그 속에 안겨있는 절집에서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만났다. 늘 살아 있는 생명의 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민주적이며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않는다.
깊은 산속에서 야영을 할 때 가장 좋은 장소는 절터이다. 풍수지리에 따른 정남향에 맑은 물이 있다. 절집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스님은 떠났어도, 누군가 수도하는 마음으로 다듬었을 승탑이나 탑재들이 절터를 지키고 있다. 어둠이 내린 산속에서 문화유산과 말없이 나누는 대화는 나를 성숙하게 한다. 어려웠던 시절 카메라를 구입해 수많은 문화유산을 담았다. 지금은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허접한 자료가 되었지만 우리 문화유산의 지킴이로 사는 초석이 되었다.
‘우리 국토는 박물관이다’ 답사 모임의 시작
1992년 마산제일고등학교에 재직하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지역 TV방송의 교통리포터가 됐다. 이른 아침 방송을 준비하러 나간 현장에서 민망한 상황을 자주 보았다. 접촉사고를 낸 운전자들이 상대방의 안위를 묻기보다 멱살잡이로 시비를 벌이는 모습이었다. ‘시민 의식을 바꿔야 사람이 먼저 보이는 세상이 된다’는 나름대로 절박감을 느꼈다. 시대가 요구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문화적 가치의 향유가 해법이라고 느꼈다. 문화적 가치는 과거와 현재 우리 삶의 총체이자 미래의 지표이다.
문화의 가치에 눈을 뜨자 우리 국토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에 절실한 공감을 느끼게 됐다. ‘우리 국토는 박물관이다’는 주제로 주변 사람들과 토론했고 답사기행을 시작했다. 한 단계 높은 문화적 가치를 일깨워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분이 김일태 시인이었다. 우리 경남의 일간지에 14년간 <우리 땅 순례>를 집필한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역문화의 발전을 기대하는 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격려와 응원을 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23년간 312회 답사기행 1만여 명 참가
1996년 10월 1일 첫 기행지로 정자문화의 고장 전남 담양을 선택했다. 가사문학과 조선시대의 원림 소쇄원이 있는 곳이다. 인공미를 가미하지 않은 원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첫 기행은 의욕만큼 되지 않았고 생소한 방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통신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우편물로 공지하고 유선전화로 접수해 답사를 이어갔다.
그 이후 23년간 국내 285회, 해외 27회, 모두 312회 문화유산답사기행으로 1만476명이 함께했다. 세월호 참사 때 한 차례를 제외하면 예정된 답사를 거른 적은 없었다. ‘옛그늘’이란 이름은 마산제일여고 박선근 교사가 지었고, 배지의 디자인은 ‘금수강산을 큰마음으로 담는다’는 뜻을 담아 장해근 화백이 10년 만에 완성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 현판 글씨는 서예가 고 윤판기 씨의 작품이다.
문화유산이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들
우리 땅에 대한 정보와 가치 인식이 매우 부족한 때였다. 우리 것에 대한 갈망을 풀어 준 것은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였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것을 책만 보고 찾아가도 헛되지 않을 정도로, 그보다 더 좋은 안내서가 없었다. 유 교수의 책으로 맺은 아름다운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강원도 정선의 ‘옥산장여관’도 그중 하나다. 예비답사를 위해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찾아갔을 때 늦은 시간인데도 가족처럼 반겨주시던 전옥매 여사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런 것이 우리 답사회가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이다. 전 여사의 <정선아라리> 공연과 밤을 새워도 못다 한 이야기를 잊지 못해 매년 여름이면 옥산장 답사기행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이다.
‘보이지 않던 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
우리 답사회 운영에는 특별한 규칙이나 회칙은 없다. 모든 사람들이 회원이 된다. 마음과 마음 그리고 문화와 문화가 이어주는 인연이다. 출발 2주전 ‘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 밴드(회원 1045명)와 인터넷카페(회원 3078명)에 답사기행을 공지한다.
참가를 희망하면 참가비 입금이 곧 접수이며 선착순으로 버스좌석이 배정된다. 참가비는 교통비와 점심식사, 입장료 등의 실비로 산출한다. 현지에서 향토사학자나 문화유산해설가의 설명을 듣는다.
보이지 않던 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 보잘것없던 것들도 사랑하면서 보면 예전과 다르다. 만나지 않고 보지도 않고 어떻게 사랑을 하겠는가! 우리의 발걸음은 행복한 마음으로 우리 땅 여러 곳을 수없이 밟았다. 정기 답사기행의 92%는 국내기행이었다.
해외답사는 우리문화 재인식 계기
답사기행의 내용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다. 초창기에는 사찰문화재를 찾아 대부분 절집 기행이 주류를 이루었다. 발길이 가장 많이 닿은 곳은 단연 전라남도였다. 비옥한 남도의 넓은 들판이 주는 안온함과 구수한 사투리가 주는 정감, 그리고 음식문화가 발달해 있어서였다. 문화관광 정책이 공무원의 입장이 아닌, 답사객의 입장에서 잘 운영되고 있는 점도 전남으로 발길을 향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른 지자체도 눈여겨볼 만한 정책들이 있다.
교통 발달로 세상이 넓어지면서 국내에만 치중하던 답사기행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2001년 중국 단동지역 고구려 유적지와 광개토대왕비를 시작으로 해외기행을 떠났다. 그때 함께 떠났던 고등학교 제자들은 이제 중년이 되어 추억을 말하고 있다. 해외답사는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문화를 만나는 기회이기도 하고,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는 기회도 된다.
유럽 전역을 비롯한 동남아지역, 중앙아시아, 일본 등 27번의 해외기행을 다녀왔다.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이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 배워야 할 것이 있고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기회였다. 해외기행을 통해서 우리 삶의 가치를 한 단계 더 성숙하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