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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가야유산 기획❽ 망자를 위해 세 칸 집을 짓다

아라가야 구덩식돌덧널무덤의 비밀


 

 

말이산4호분 측벽에 수상한 홈(?)

1917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의 기록을 찾던 교토제국대학 이마니시 류(今西龍) 교수는 함안 말산리 고분, 즉 말이산고분군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4호분(당시 34호분)25호분(당시 5호분)이 주 대상이었다. 특히 높이 9.7m, 지름 39.4m의 대형 봉분을 가진 4호분을 주목했다.

조사는 19171014일 개토제부터 열흘간 진행됐다. 그 결과 34호분은 길이 9.69m, 1.72m, 높이 1.66m의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무덤 내부에 특이한 시설이 있었다. 36~45cm, 깊이 90cm의 네모난 홈이 무덤의 양쪽 긴 벽에 각각 2개씩 마주보고 있었고 북쪽 짧은 벽 덮개석 아래 1개의 홈이 있었다. 그는 1920년 이 홈들을 무덤 내부를 밝히는 등잔이나 위패를 놓는 감실(龕室)’로 보고했다.

 

감실이 아닌 목가구시설

1970년대 말이산 4호분의 홈들을 감실로 보고 아라가야의 특징적인 불꽃무늬토기를 감실에 사용된 등잔용 토기로 본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1992년 말이산고분군 북쪽에서 완벽한 형태의 말갑옷이 출토되면서 말이산고분군에 대한 본격 조사가 시작된다.

5년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5호분과 8호분, 15호분, 22호분, 38호분, 39호분, 54호분에서도 장벽과 단벽 등의 홈이 발견됐다. 그래도 불을 밝힌 감실 흔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장벽과 단벽의 홈이 같은 높이에서 마주보고 있는 사실은 알았다. 또한 공통적으로 단벽의 홈이 장벽의 홈보다 높은 덮개석 바로 아래라는 사실은 확인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이주헌 학예연구사(현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는 이 홈들을 감실이 아니라 나무기둥을 가구(架構)한 특수목재가구시설인 들보시설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장벽의 홈이 무덤 내부의 무덤주인, 유물부장, 순장자 사이의 공간을 나눠주고 있다는 연구성과도 나와 들보시설’, ‘목가구시설등으로 불린 이 홈의 정체가 일부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 돌덧널무덤 긴 벽의 홈은 보공’, 짧은 벽에 설치된 홈은 도리공으로 불리고 있다.


아라가야 최고지배층 무덤의 특징

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은 5세기 중엽부터 등장해 6세기 전엽까지 사용되었다. 이 중 아라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단일 봉분에 좁고 긴 평면으로 하나의 매장시설을 설치한다. 또 무덤 내부를 [유물부장공간]-[무덤주인공간]-[순장자공간]으로 분할한다. 이와 함께 말이산고분군에서 나온 목가구시설은 아라가야 최고지배층 분묘의 특징이다. 말이산고분군에서만 나오고 김해, 고령, 고성, 창녕 등 다른 가야지역은 물론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최고 지배층을 위한 세 칸의 집

목가구시설의 단면을 보면 전통가옥의 삼량가(三梁架) 형태와 매우 비슷하다. 보공의 위치와 맞게 내부는 정면 3, 측면 1칸짜리 집을 떠올리게 한다. 고대인들은 망자의 이승에서의 삶이 저승에서도 계속되기를 바라며 이승의 물건들을 부장하고 망자에 속한 사람들을 죽여 순장했다. 아라가야의 최고지배층이 만든 이 세 칸짜리 망자의 집은 현세에서의 그들의 권력이 저승에서도 이어지길 원하는 간절한 바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 무덤내부 별자리가 확인된 13호분에서도 직경 40cm 대형 목가구시설의 흔적이 확인됐다. 아직 시작단계인 아라가야 목가구시설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 고대 아라가야인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조신규 함안군 가야사조사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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