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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가야유산 기획⓮ 양산, 경계의 땅에서 문화를 꽃피우다

 

 

가야와 신라의 경계 양산

밖에서 보는 양산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신도시 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통도사를 낀 역사도시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사실 1500~16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양산은 가야였다. 이런 사실이 생소한 것은 연구와 조사의 부족도 원인이지만 양산은 가야와 신라의 경계에 위치한 어중간한 지역쯤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더 큰 이유이다.

1990년대 양산 신도시 조성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가야와 관련된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됐다. 특히 강력한 정치집단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는 북정리 고분군, 신기리 고분군 등의 거대한 고총고분의 존재는 양산이 점이지대의 소집단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양산은 언제부터 가야였을까?

고대 양산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신라본기 탈해니사금조에서 처음 확인된다. 1세기 후반 사로국이 황산진(양산 물금)에서 가야병사와 싸워 승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낙동강이라는 자연 경계를 고려할 때 양산의 가야병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해당 기록의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가야와 신라가 양산을 두고 대립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양산 소토리 고분군은 지금의 양산 인터체인지(IC) 조성 과정에서 확인되었는데, 여기에서 3~4세기 덧널무덤(목곽묘)들이 나왔다. 이 덧널무덤은 경주에서 유행했던 방식이다. 또 가락국의 상징적 토기인 아가리가 바깥으로 꺾인 굽다리접시(外折口緣高杯)’, ‘손잡이달린 화로모양 그릇받침(把手附爐形器臺)’ 등 가야유물이 많이 출토됐다. 이처럼 양산에서는 가야 문화와 신라 문화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산, 경계의 땅에서 문화를 꽃피우다.

5~6세기 양산의 정치집단에 대한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북정리 고분군(사적 제93)과 신기리 고분군(사적 제94)이다. 1920년 조선총독부가 처음 발굴한 북정리 고분군 부부총(10호분)에서 부부추정 골 2구와 순장자 인골 3구를 비롯해 금동관, 금제귀걸이, 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등 화려한 부장품과 토기류, 말안장, 말띠드리개 등이 출토됐다. 1990년 동아대 박물관의 재발굴을 통해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으로 밝혀졌다. 순장을 근거로 신라 지증왕 3(502) 순장 금지령 이전인 5세기 후엽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데 최근에는 김해 가락국이 멸망하는 532년경 6세기 중엽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이러한 논란은 양산을 가야 또는 신라로 보고자 하는 이분법적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고대 양산에 자리했던 정치집단은 가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낙동강이라는 최고의 교통로를 활용해 다른 가야세력과 더불어 신라와도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회에서 높고 큰 고총고분의 축조는 많은 노동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지배자와 정치집단의 존재를 의미한다. 또한 다른 문화권의 위신재(우월한 신분을 나타내는 물품)는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 외에도 두 지역 간의 정치 파트너로서의 친밀관계나 필요성에 의해 주고받은 물품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북정리와 신기리 고분군 등에서 확인되는 대형 고총고분과 거기에 부장된 신라식의 위신재는 고대 양산의 정치집단이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어떠한 대외관계 속에서 성장, 발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양산의 가야사 복원

양산시도 가야사 복원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꽤 굵직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올해는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았던 중부동 고분군(사적 제95)의 발굴 및 종합정비계획 등을 추진했다. 군지산에서 서쪽 구릉에 위치한 중부동 고분군은 탐방로조차 없었지만 묵묵히 진행된 발굴단의 조사를 통해 가야 지배층의 무덤군으로 밝혀졌다. 내년에도 고대 양산의 정체성과 가야문화 규명을 위해 다방동 패총에 대한 학술조사와 문화재지정 추진을 이어갈 계획이다.

양산은 또 하나의 가야였다. 지리적 위치 탓에 다른 가야에 비해 신라에 빨리 통합되었을 뿐이다.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고도 경계지대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던 고대 양산의 가야사 연구와 복원은 이제 막 시작 단계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백진재 양산시 문화관광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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