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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가야유산 기획⓱ 귀걸이, 가야 미(美)를 전하다

 


처음에는 구슬을 보배로 삼다

고대의 귀걸이를 떠올린다 해도 가야의 귀금속은 그리 익숙하지 않다. ‘()’의 왕국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장식이 달린 가야 귀걸이는 지금까지 50점쯤 출토됐다. 대부분 대가야의 유물이고 금관가야의 귀걸이는 드물다. 드리개가 붙은 금관가야 귀걸이(垂下式耳飾)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3점이 전부다. 아울러 금으로 제작된 위세품(威勢品, 권력과 신분을 상징하는 물품)도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중국 역사서 삼국지위서 동이전은 삼한에서는 구슬을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지만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러나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라고 기록한다. 3세기 중엽 삼한 사람들은 황금보다 구슬을 더 귀하게 여겼다는 얘기다. 실제로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압도적인 수량의 수정(水晶)과 마노(瑪瑙) 등의 구슬 장신구가 출토됐다. 김해 대성동 18호분에서도 인골의 귀 주변에서 벽옥제의 대롱옥(管玉)과 비취제의 굽은옥(曲玉) 귀걸이가 나왔다. 가야인들의 뛰어난 제철기술을 감안하면 단지 구슬을 귀하게 여겨 금공품 제작을 덜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귀걸이

귀걸이는 4세기 중국 북방의 삼연(三燕) 문화를 받아들인 고구려를 통해 백제, 신라로 전해졌다. 가야는 한성백제(도읍이 현재의 서울이었던 시기의 백제)에서 만든 귀걸이를 모방하다 5세기에 들면서 독자적인 귀걸이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귀걸이는 귀에 거는 중심고리(主環), 중간장식(中間飾), 드리개(垂下式)로 구성된다. 가야 귀걸이의 중심고리는 가늘다(細環). 중간장식은 공구형(空球形, 공모양)이 가장 유행했고 원반형, 과형(瓜形) 등 다양하다. 화려한 드리개는 귀걸이의 이미지를 결정짓는다. 변화 과정이 뚜렷해서 장소와 시기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하트 모양의 심엽형(心葉形) 드리개는 삼국과 가야에서 가장 유행했다. 심엽의 금판에 좁쌀보다 작은 금알갱이나 보석을 붙인 신라에 비하면 가야의 귀걸이는 다소 단조 롭다.

가야만의 세공 기술과 탁월한 아름다움은 원추형(圓錐形)과 치자형(梔子形) 드리개에서 볼 수 있다. 원추형(위 사진)은 얇은 금판을 말거나 붙여서 원뿔모양으로 만들었다. 치자형은 치자나무 열매의 모습을 닮았다. 금판 3장을 안팎으로 두드려 입체무늬를 만드는 응용기법 등 가장 발달된 형태로 생각된다. 신라와는 다른 가야 고유의 미적 감각과 금속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다.

 

가야 귀걸이, 아름다움의 지평을 열다

지난해 1226, 가야 유물 5건이 새롭게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됐다. 가야유물의 경사이다.

특히 합천 옥전 고분군의 귀걸이 3쌍이 가야 귀걸이 최초로 보물이 되는 겹경사를 맞았다. 가야 금공품의 아름다움과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앞으로 땅 속의 더 많은 가야 유물들이 재평가되기를 소망한다.

 

* 이번에 보물(2044)로 지정된 옥전고분군 M4호분 금귀걸이는 다라국(多羅國) 옥전 사람의 제작방식이 대가야의 고령 방식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다라국 금세공 장인의 고뇌를, 망국의 슬픈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은혜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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