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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특집]가야유산 기획㉑ 용(龍), 가야 왕을 상징하다

작성2020년 07월[Vol.88] 조회80

 


·금동·은으로 장식한 금관가야의 왕

3세기 후반 편찬된 중국 역사서 삼국지는 삼한의 풍속을 이렇게 묘사했다. ‘구슬을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 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 가야유적에서는 정말 금과 은으로 만든 물건들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5세기에 들어서야 금, 은제품들이 본격적으로 부장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의 3~4세기 가야무덤에서 나온 금동제 보관(寶冠)과 팔찌는 예외적인 사례로 해석한다.

2012년과 2013년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중요한 발견이 있었다. 4세기 한반도 남부의 무덤에서 처음으로 금·금동··청동제 유물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91호분에서는 금동·청동으로 만든 말띠꾸미개와 방울, 88호분에서 금동 허리띠 장식구, 70호분에서 금동 칼집끝장식 등이 쏟아졌다. 이 덧널무덤들은 크기와 위치, 출토유물로 보아 최고 권력자들이 묻혔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금관가야의 왕과 왕족들이 4세기 무렵부터 금과 금동제의 귀금속들을 본격적으로 사용했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가장 빠른 시기의 용무늬

고대 문화에서 용()은 왕권을 상징하는 상상 속 신성한 동물이다. 이는 곧 강력한 지배 권력의 표현이었다. 가야의 경우 최근 보물로 지정된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나온 용봉무늬 둥근고리큰칼이 대표적이다. 신라에서는 허리띠 장식구 등에 용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모두 5세기 이후의 것이다.

대성동고분군에서도 용무늬 유물들이 출토됐다. 투조기법(透彫技法, 판을 도안대로 오려내는 기법)으로 제작한 허리띠 장식구와 말갖춤이 있다.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용무늬 유물로는 가장 빠르다. 4세기에 이미 용이 권력을 상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허리띠 장식구에 새겨진 용

1~3세기 한반도 남부에서는 호랑이나 말 모양의 허리띠고리 장식구를 주로 사용했다. 김해에서는 모두 6점이 확인됐지만 왕의 무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용무늬 금동제 허리띠 장식구가 출토됐다. 금관가야의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특히 88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 장식구에서는 머리, 몸통, 네 발, 꼬리 등 전신이 묘사된 용과 또 다른 용의 머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두 마리의 용은 마치 사랑을 나누는 듯 마주보고 있는데, 이러한 문양과 표현기법은 중국 서진(西晉, 265~316)의 금동제 허리띠 장식구와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말갖춤의 용무늬 장식

고대 최고의 탈 것이자 전쟁무기는 말이었다. 말을 타거나, 장식, 보호를 위한 일체의 장비를 말갖춤이라고 한다. 대성동에서 출토된 말갖춤에서도 용무늬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금동제의 말띠꾸미개이다

약간 볼록한 금동판(지름 6)에 뿔이 달린 용이 입을 벌렸고 그 가장자리로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형태로 투조했다.

다른 하나는 금동제의 말안장 부속구로서 안장과 가슴걸이와 후걸이의 끈을 연결하는 띠고리 장식구이다. 금동제의 납작한 반구형(지름 4.5)으로 중앙에 정사각형의 구멍과 용 두 마리가 있다. 모두 사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어 당시의 사람들은 매우 신비롭고 귀한 물건으로 생각했을 법하다.


앞서 설명한 용무늬가 베풀어진 유물들은 사실 메이드 인 금관가야가 아니다. 4세기 중국 화북지역을 차지한 전연(前燕, 337~370)과 중원의 진()에서 만든 것을 금관가야의 왕실이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 한반도의 최남단에서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국제교류를 이끌었던 금관가야 왕권의 면모를 추적해 가고 있다.

 

 

글 심재용 김해시청 학예연구사   사진 대성동고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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