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선

조선 왕조는 개국 이후 성종대에 이르는 1백여 년 동안, 왕조 창업에 참여했던 개국 공신과 그 자손들, 그리고 세조(1455~1468)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집단과 그 자손들로 형성된 이른바 훈구(勳舊) 세력이 통치집단의 근간을 이루었다.

따라서 조선 왕조는 이들 훈구 세력의 협력을 통해서 왕조 초기의 안정적인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문화적 융성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 집권세력에 의하여 안정기반이 구축된 뒤로 그들이 차츰 직권을 남용하게 되어 안정기반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꾸준히 성장해 온 이른바 사림세력이 성리학(性理學)의 도학사상을 제반 사회질서의 가치기준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함에 따라 기존의 훈구세력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선 :훈구와 사림의 대립 (무오ㆍ갑자ㆍ기묘사화)을사사화 (1545) 사림내 신구대립 (국론통일 장애)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들을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계통의 청요직(淸要職)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러자, 훈구세력이 연산군 때 무오ㆍ갑자의 양대 사화를 불러일으켜 사림들에게 타격을 가함으로써 조선 정국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후 반정(1506)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때의 양대 사화로 인하여 문란해진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파 인사들을 기용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훈구세력들은 그들의 권위와 이권을 위협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결국 1519년(중종 14년)에 보복적 정쟁(政爭)인 기묘사화를 일으켜 또 한 차례 신진세력에 타격을 가하였다.

조선은 이와 같이 불과 20여 년 동안에 세 번의 사화로 말미암아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여리 측면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분제도가 붕괴되고 군역(軍役)이 불균형하게 부과되었으며 세력자들이 직권을 이용하여 농장을 확대하는 폐단이 일어났는가하면, 공납제도(貢納制度)의 문란으로 농민의 부당이 과중해지는 등 사회의 기본질서가 뒤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소정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 척신(戚臣)들의 정권 쟁탈전인 을사사화(1545)에 또 다시 휘말려들었으며, 사림들도 그들 내부에서 상호 대립하는 새로운 정쟁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그러다가 명종이 모후(母后)의 대리정치에서 벗어나 직접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자, 외척 세력들이 제거되고 명종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사림세력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대에는 신진 사림들에 의한 새로운 지배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선조조에 이르러 조정의 지배세력이 된 사림세력은 다시 신구세력으로 양분되어 자파의 인물을 정계의 요직에 진출시킬 수 있는 인사권의 장악을 둘러싸고 대립함으로써 국론의 통일에 적지 않은 장애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