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명나라

명나라는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1368 ~ 1644)이다.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은 1368년 남경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이후 홍무제자 북벌을 개시하자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북경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조사 및 인구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배포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398년 홍무제가 죽자 황제 계승을 둘러싸고 반란과 찬탈 등이 발생해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워졌고, 영종(1436~1449, 1457~1464) 때의 ‘토목의 변(土木之變, 1449)’으로 명의 국가적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종이 귀환한 후에 영종의 궐위 기간 동안 황제의 직무를 대행하였던 경제(景帝)와의 사이에 내분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이에 편승한 환관들의 정치개입으로 말미암아 명나라 조정의 정치기강이 크게 흐트러졌다.
명나라 :환관들의 정치개입 (영종)사치와 유흥, 라마교에 대한 광신 (무종)붕당을 만들어 대립 반목 (신종)

그 후,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명나라는 무종(1506~1515)의 사치와 유흥, 그리고 라마교(Lama敎)에 대한 광신 등으로 말미암아 제반 정무가 환관들에 의해 좌우됨으로써 정치적 혼란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무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종(1522~1566)은 강력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전대의 정치적 폐단을 혁신하고 인사제도를 쇄신하여 명의 정치는 한 때 그 면모를 일신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신진 개혁파와 보수파의 치열한 정쟁만을 야기시켜 개혁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이 무렵부터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들이 명나라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어 명나라를 위협하였다.

그 후 명나라 신종(神宗, 1563 ~ 1620, 명나라 제14대 황제(1572 ~ 1620). 만력제(萬曆帝)라고도 한다)은 즉위 초기에 ‘만력의 치’라는 개혁의 시대를 열어나갔다. 한 동안 정치, 경제, 국방 등 다방면에 걸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국내의 해이해진 정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몽골과 화해 협력하여 북쪽 국경을 평온하게 하였고, 요동 섬서(陝西) 지역을 개척하고 남쪽의 반란세력들을 평정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점차 정사를 게을리 하고 사치, 방탕에 빠져들어 국고가 탕진되고 조정의 정치 질서가 무너져 환관들이 재차 국정을 어지럽혔다.
또 명나라 조정은 붕당을 만들어 대립 반목함으로써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