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여진족

여진족은 동만주 산간지방에 자리 잡은 건주여진(建州女眞), 송화강 유역을 차지한 해서여진(海西女眞), 흑룡강 유역을 점유한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그 중에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건주여진은 명나라 군정 아래 들어가면서부터 건주위(建州衛)ㆍ건주좌위(建州左衛)ㆍ모련위(毛憐衛) 등을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여진족에 대하여 때로는 강온 양면책을 폈으나, 대체로 그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희유정책을 기본지침으로 삼았다. 여진족 중에는 육진(六鎭)과 폐사군(廢四郡) 지역 등 조선의 영토 내에 들어와 사는 자가 많았는데 그들을 번호(藩胡)라 불렀다. 조선 조정은 이들이 우리 영내에 들어와 사는 것을 원칙적으로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미 살고 있는 거주자에 대해서는 거주지와 활동지역을 일정하게 통제하여 다른 번호와의 왕래를 금지하는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했다.

여진족 :동족간 분리, 조선의 회유정책1583년 니탕개의 조선침입통일에 박차, 임진왜란 때 조선원조 표명 (누르하치)

대부분의 번호들은 성 밑에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이들은 조선의 변민(邊民)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졌으며, 수령이나 변장(邊將)의 세력권에 있었으므로 항시 조선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했고 변방 관원의 지시에 복종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번호는 본토 여진족의 반감을 사는 일이 종종 있어서 동족간에 충돌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번호는 변경 관원에게 구원을 청하는 일도 있어서 조선 조정은 번호의 보호를 위해 유능한 변장으로 하여금 본토 여진족과의 대결도 꾀한 바 있으나 가급적 충돌만은 피하고자 하였다.

여진족과의 자질구레한 사건들은 늘 있어왔지만 큰 변란 없이 내려오다가 16세기 말엽인 1583년(선조 16)에 이르러 마침내 여진의 일대 침입사건이 있었다. 니탕개(尼蕩介)의 침입이 그것이다. 두만강 방면의 추장 니탕개는 선조 초부터 육진을 자주 드나들면서 공손한 태도로 예의를 갖추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하였다. 그런데 1583년에 이르러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인근 번호와 연합하여 경원부(慶源府)를 함락하고 아산ㆍ안원 두 보(堡)를 함락시킨 뒤 경성부(鏡城府)를 포위하는 등 일대 번호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북병사 이제신(李濟臣)과 온성부사 신립(申砬)들에 의해서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번호의 변심을 염려하던 조선 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번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진인의 상경은 더욱 제한을 받게 되었고, 반란의 주모자를 번호로 하여금 유인하게 하여 처단한다는 선에서 일단 수습되었다. 그러나 번호를 모두 축출하지 않은 것은 추방 뒤에 변방 수비가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란사건이 있은 후 번호정책이 회유에서 강경으로 선회한 느낌은 있었지만 번호의 완전한 축출은 실행을 보지 못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번호의 변경 거주는 계속되었다.
그 뒤에도 여진족은 자주 우리 국경을 침입해왔으나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던 터라 그때마다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건주위 출신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등장하면서부터 여진족은 통일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25세 때인 1583년(선조 16)부터 활동을 시작하는데 명나라에 대해서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주위의 여진부락을 쳐서 하나하나 합병하고, 1593년 해서여진과 몽고 연합군의 대병력을 혼하(渾河)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긴 뒤 그 세력을 확고히 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원조하겠다는 뜻을 전해올 정도로 그들의 힘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들의 뜻은 조선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조선으로서는 흥기하는 여진세력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