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선 왕조는 개국 초기부터 병역제도와 군사조직을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시키는 데 크게 역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군사제도의 운용 원칙도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丁男: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국민개병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군제의 운용이 치밀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군비와 병력이 확충되어 정규군 약 15만명 선을 유지하였으며, 보충 병력인 보인을 합하여 도합 50만명 선의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조선인이 전쟁에서 깃발을 흔드는 모습
그러나 오랜 평화와 문운의 융성으로 말미암아 국민적 기풍이 문약에 빠지고, 상하의 생활 풍조가 사치와 안일로 기울어지게 됨에 따라 국방체제도 점차로 문란해졌다. 더우기 조선 정계에서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사화와 당쟁의 형태로 지도층의 분열상을 드러내면서부터 사회적으로 혼란이 가중되어 국방력이 급속도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초기의 방위체제는 세조때부터 진관체제가 채택되어 1백여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으나, 을묘왜변(1555)을 전후하여 군사적 환경이 급격히 변함에 따라 진관체제를 변형시킨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방위체제의 전환은 남방의 왜구 및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이 소규모로 침입해왔을 때에 방어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국방의식과 군정의 기강이 점차 해이해짐에 따라 유명무실하게 되어 남해안과 북방의 변경지역에서 그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특히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군역(軍役) 의무를 아예 면제하거나 대역인(代役人)을 세우는 명목으로 일정한 양의 포(布)를 납부하게 하는 방군수포(放軍收布)와 대역납포(代役納布)의 제도가 공공연하게 시행되었다. 이는 결국 병력이 명부상으로만 존재하거나, 무력한 대역인만으로 군을 편성하게 하여, 병력부재의 현상을 심화시켰다. 그리하여 선조때에 이르러서는 중앙군이나 지방군 모두 편제상의 정원만 병부에 기록되어 있을 뿐 실제 병력은 텅 빈 상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조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수차에 걸쳐 왕래한 일본사신과 통신사 일행의 보고를 통하여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인식하고 김수(金睟)ㆍ이광(李洸)ㆍ윤선각(尹先覺) 등을 각각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의 관찰사(감사)로 임명하여 성곽의 수축과 병기의 수리 등을 독려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군 인사의 개편을 단행하여 남해연안의 국방요지에 유능한 군사 지휘관을 새로이 배치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부터 서북변방의 국토 개척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남해 연안에 침입하는 왜구의 격퇴에 주력하여 화약병기의 수요가 증대됨에 따라, 조선에서는 화기의 개발과 개량에 치중하여 천자총통(天字銃筒)ㆍ지자총통(地字銃筒)ㆍ황자총통(黃字銃筒) 등 대형화포를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대비한 준비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고, 일부 수령들은 전쟁준비를 중지해달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다만 전라좌수사로 발탁된 이순신을 비롯한 일부 장수는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려고 하였다. 결국 조선은 이러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