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침입과 관군의 붕괴

일본의 침입과 관군의 붕괴

침략군의 규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침략군을 편성하여 조선 침공을 명하고 자신은 나고야(名古屋)에서 전국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다. 침략군은 9개 부대로 분류ㆍ편성되었는데, 각 부대를 지휘한 주장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 제1대 주장 고니시(小西行長) 병력 1만 8,700명
  • 제2대 주장 가토(加藤淸正) 병력 2만 2,800명
  • 제3대 주장 구로다(黑田長政) 병력 1만 1천 명
  • 제4대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 병력 1만 4천 명
  • 제5대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 병력 2만 5천 명
  • 제6대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 병력 1만 5천 명
  • 제7대 주장 모리(毛利輝元) 병력 3만 명
  • 제8대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 병력 1만 명
  • 제9대 주장 하시바(羽柴秀勝) 병력 1만 1,500명

이상의 병력 15만 8,700명은 육군의 출정한 정규 병력이고 이밖에 구키(九鬼嘉隆), 도오도오(藤堂高虎) 등이 이끄는 수군 9천 명이 승선하여 해상에 대비하였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천 명이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했다. 이외에도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 침입하여 선척(船隻)을 관리하는 등 정규군 외에 막대한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수는 20여 만이 되었다. 일본이 침입할 당시에 총병력은 30여만 명으로, 출정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10만을 머물게 하고 3만의 군사로 교토(京都)를 수비하게 하였다.

일본의 침입

조선을 가장 먼저 침입한 일본군은 고니시가 이끄는 제1대였다. 고니시는 1592년(선조 25) 4월 13일 휘하의 장졸을 병선 700여 척에 분승시키고 오전 8시에 오우라항(大浦港)을 떠나 오후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며, 다음날 부산진을 침입하였다.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군민과 함께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다음날 동래부(東萊府)를 침공하였는데,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또한 전사하고 성 안에 있던 군민이 몰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이후 조선관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중로를 택하여 대구․선산 등지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다. 이때 순변사 이일이 상주를 지키고 있다가 고니시의 군과 일전을 각오하였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여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한편 가토가 이끄는 제2대는 쓰시마(對馬島)에 대기하고 있다가 제1대가 부산상륙에 성공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좌로를 택하여 울산을 함락하고 영천․군위 등을 거쳐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 충주로 향했다. 같은 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우로로 지례․금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청주방면으로 침입했다.

제4대는 김해에서 제3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를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으며, 제5대는 제4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며 북쪽을 향하여 침입하였다.
가토 조선정벌도 가토 조선정벌도

제6대와 7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고, 우키다가 이끄는 제8대는 5월 초에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으며, 제9대는 4월 24일에 일기도(壹岐島)에 머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