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패보와 선조의 피난

충주패보와 선조의 피난

고니시의 부대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일단 합류하였으나 다시 진로를 달리하여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로 나가 강을 건너 양근을 경유하여 동로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ㆍ용인으로 빠져나와 한강 남안에 이르렀다. 제3대와 모리의 제4대도 4월 25일 성주에 이르렀으며 추풍령을 넘어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기도로 빠져나와 한양로 향했다.

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날아왔으나 그래도 충주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한양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선조의 서천(西遷)을 주장하는 일부 관료들도 대의에 눌려 강력한 주장을 펴지 못한 채 다만 28일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백관(百官)에 명하여 융복(戎服, 군복)을 입도록 하였는데, 다음날 29일 충주패보가 전해지자 물의를 일으켰던 선조의 서천(四遷)에 대해 시비도 따질 사이없이 그날 밤으로 서천을 결정하였다.

도성을 떠나기에 앞서 장자 임해군(臨海君)을 함경도로 가게 하고 셋째아들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가게 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왜군이 강원도에 들어오자 순화군도 임해군을 따라 함경도로 들어갔다.
한양을 빠져나가는 선조-태합기 한양을 빠져나가는 선조-태합기

선조가 서천하기에 앞서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병비가 허술하여 왜군과 대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밤이 깊어 이일의 장계가 도착하였는데 「왜적이 금명간에 반드시 도성에 도달할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융복으로 갈아입고 서천의 발길을 옮겼으며 세자 광해군(光海君)이 왕의 뒤를 따랐다.

일본군이 한양에 쳐들어온 것은 5월 2 ~ 3일이었다. 이때 한강을 수비하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은 적의 조총탄이 지휘본부인 제천정(濟川亭)에 떨어지자 한강수비가 어려움을 깨닫고 임진강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유도대장 이양원도 도성의 방어가 불가능함을 알고 한양에서 철수했다.

개성에 머물고 있던 선조 일행은 도성이 왜군에 함락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평양으로 옮겨갔으며, 김명원이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왜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보고를 받고 평양수어도 포기한 채 의주를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한편 5월 초에 한양을 함락하여 본거지로 삼고 잠시 쉬었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북침을 계속하던 왜군을 양주 게너미고개(蟹踰嶺)에서 부원수 신각(申恪)이 이끄는 관군이 기습했으나 북침을 중단시킬 만큼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이후 임진강에서 도원수가 지휘하는 관군이 적의 북침을 일시 저지하였으나 적의 전술에 말려들어 실패하였다. 기대를 모았던 하삼도(경상ㆍ전라ㆍ충청도) 대군도 삼도 관찰사의 지휘하에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도중 용인ㆍ수원간에서 소수의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대패하고 물러나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에 가까웠다.

임진강을 건너간 왜군은 3군으로 나뉘어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방면으로 침입하여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다. 함경도를 침입한 가토의 군은 본도 관찰사 유영립(柳永立)을 포박하였고, 병사 이혼(李渾)은 반민(叛民)에게 피살되었다. 본도에 들어온 임해군ㆍ순화군과 이들을 호위했던 대신들도 반민에게 포박되어 적진에 넘겨지는 등, 도 전체가 적중에 들어갔다. 황해도를 침입한 구로다의 군은 해주를 본거지로 삼고 대부분의 고을을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했다.

결국 일본이 침입한 지 한 달여 만에 호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의주에 머물던 선조도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