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의병

의병은 관권(官權)에 의하여 징모(徵募)된 군인(관군)이 아니고 스스로 모여든 민병집단이므로 수령의 절제(節制)를 받지 않고 의병장의 지휘하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관군보다 비교적 자유스러웠다.
관군의 무력으로 인하여 국토가 왜군에 짓밟히고 많은 사람이 죄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향토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의병들은 봉기하였다. 의병의 신분구성을 보면 양반계층에서 천민신분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의병생활을 하는 기간에는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일체감을 유지하여 구국전선에 앞장섰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관원으로 문반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무인층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가 하면 아직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으나 덕망이 높아 지방인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지도자는 먼저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외직에 재임할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의 유애(遺愛)가 있어 그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하였고, 이를 확대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모았다. 따라서 그 활동무대도 자연히 지역적으로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의병의 바탕을 이루는 정신은 철저한 민족적 저항의식으로, 이것을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오랜 유교교육을 통하여 깊이 뿌리박게 된 것도 의병봉기의 하나의 동기였다고 볼 수 있다.

1593년(선조 26) 1월 명군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달하는데, 이 인원은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1593년에 오면 관군이 차츰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그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의병장으로 곽재우(郭再祐)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김천일(金千鎰)ㆍ이정암(李廷敆)ㆍ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ㆍ정문부(鄭文孚)ㆍ우성전(禹性傳)ㆍ권응수(權應銖)ㆍ변사정(邊士貞)ㆍ양산숙(梁山璹)ㆍ최경회(崔慶會)ㆍ김덕령(金德齡)ㆍ유팽노(柳彭老)ㆍ유종개(柳宗介)ㆍ이대기(李大期)ㆍ제말(諸沫)ㆍ홍계남(洪季男)ㆍ손인갑(孫仁甲)ㆍ조종도(趙宗道)ㆍ곽준(郭敆)ㆍ정세아(鄭世雅)ㆍ이봉(李逢)ㆍ임계영(任啓英)ㆍ고종후(高從厚)ㆍ
의병곽재우 의병곽재우

박춘무(朴春茂)ㆍ김해(金垓) 들을 들 수 있으며, 이들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그 공로로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는 의병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