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승군

의승군

임진왜란에서 의승(義僧)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승려로서 최초로 봉기한 이는 영규(靈圭)이다. 그는 공주 청련암에 있으면서 수도하는 한편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술 익히기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는 난이 있을 것을 예측했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의승장이 되어 의승군을 모집하였으며, 휘하에 800명(『선조수정실록』에는 500 ~ 600명)의 의승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봉기 시기는 하삼도 의병이 일어나는 시기와 때를 같이하고 있다.

의승군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은 1592년 7월로, 나라에서 승통(僧統)을 설치하고 의승군을 모집하기 위하여 묘향산에 있는 휴정(休靜:서산대사)을 초치한 이후부터였다. 선조가 의주 행재소에 있을 때 묘향산에서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휴정은 선조를 배알하는 석상에서 8도16종(선ㆍ교종 각 8인) 도총섭(都摠攝)의 직책을 받음으로써 전 승군을 관장하게 되었다. 휴정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8도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을 모집했다. 의엄(義嚴 : 속명은 곽언수)은 황해도에서, 유정(惟政 : 사명당 송운대사)은 강원도에서, 처영(處英)은 호남 지리산에서 각기 봉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휴정의 제자들로 임진왜란중 의승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의승군이 가장 많은 활약을 한 기간은 1592년 6월부터 다음해 1593년 4월 도성을 수복하기까지이다. 이 기간 중에 의승군이 활약한 전투로는 청주성ㆍ평양성ㆍ행주산성전 등이다.

의승장으로서 의승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먼저 공을 세운 이는 영규이다. 그가 승군을 거느리고 활동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으나 청주성 탈환전투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러나 금산성전투에서 조헌을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의병곽재우 송운대사동상

한편 법흥사에서 대기하고 있던 휴정은 관동지방에서 의승군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이곳에 온 유정의 의승군과 자신이 모집한 1,500명 그리고 각처에서 모여든 의승군을 합하여 5천여 명의 의승군 대집단을 형성하였다. 휴정은 주장으로 그들을 총지휘하였고 유정은 부장으로 참모역을 담당했다. 이들은 의승군을 소모하기에 앞서 병기와 군량미까지 준비하였다.

이해 10월 명나라 원군을 기다리며 재정비된 관군과 승군만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11월에는 의승군만으로 평양성을 진격할 태세까지 갖추었으나 심유경이 화의 교섭차 적의 진영에 있다는 이유로 그가 귀환하는 것을 기다려 관군과 함께 진격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 때문에 실기하게 되었다. 승군은 다음해 평양성탈환전투 때 모란봉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으며 평양성수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해 4월 한양이 수복되자 선조를 호가한 휴정은 고령인 관계로 승책(僧責)을 유정과 처영에게 넘겼다. 이때부터 유정이 전체 의승군을 지휘했다. 이해 2월 권률의 행주대첩이 있기까지 처영이 인솔한 의승군의 활약은 눈부셨으며 대첩으로 이끄는 데 공헌이 컸다.

이외에도 각처에서 의승군이 거둔 전과는 컸다. 의승장 신열(信悅)은 진주 부근을 주무대로 의병장들과 합세하여 많은 적을 격파했고, 의승 법정(法正)은 황해도 중화지방에서 다수의 일본군을 참수하였으며, 의승 인준(引俊)도 의승군 200명을 거느리고 충청도에서 기의하여 왜군과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