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의 제해권 장악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전선 수는 모두 250여 척 정도였다. 당시 경상ㆍ전라 양도의 조선수군 진용을 보면 경상좌수사에 박홍(朴泓), 경상우수사에 원균(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李舜臣),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되었고, 경상좌수사 박홍도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장비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은 실정이어서 전라좌ㆍ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감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는 원균도 가세하였으나 이순신 단독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진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쳤던 이 해전에서 이순신함대는 옥포ㆍ합포ㆍ적진포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파괴하여 불사르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벌어진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에 걸쳐서 있었으며 사천ㆍ당포ㆍ당항포ㆍ율포 등 4회 해전에서 적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했다.
제승당에 있는 사천해전도 모습 사천해전도 - 제승당

조선군은 전사 11명, 부상 26명이었다. 이 2차 출동에서는 전투 도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가 가세하였고, 원균의 3척을 합해 연합함대의 규모는 51척이나 되었다. 특히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이 사용되었으며, 그 효능이 입증되어 이후 해전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이순신은 7월 6일부터 13일까지 3차 출동에 나섰다. 6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였다. 견내량에 정박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를 펼친 듯이 전선을 배치하는 전술)을 펴고 각종 총통을 쏘아 먼저 2 ~ 3척을 격파하자 적선은 겁을 먹고 도망하려 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은 일본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분파(焚破) 또는 당파(撞破)하고 나포하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한산도대첩이다.
한산도해전도 모습 한산도해전도

이후 조선 수군은 이날 견내량에서 잠시 쉬고 9일 다시 적선을 찾아 떠나 10일에서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안골포에 정박중인 적선을 포격과 엄습으로 모두 파괴하고 육지로 도망한 잔적을 소탕한 다음 12일에 한산도에 이르러 원균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육지로 도망친 적을 소탕하게 하고 13일 여수로 돌아왔다. 이 3차 출동에서 조선군은 전선 약 100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고 왜군 250급을 참획하는 등 전쟁 발발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이 한산도ㆍ안골포해전으로 조선군이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서해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후 8월 24일부터 9월 2일, 적의 본거지였던 부산포로 출격한 조선 수군은 절영도(지금의 영도)에 이르러 적선 수척을 파괴하고 이어 이순신은 왜선 470여 척이 열을 지어 정박하고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전함대를 돌진시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적선을 분파하였다. 이날 종일 교전한 끝에 적선 10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일본군은 해전을 기피하고 육병(陸兵)으로 전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듯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지휘능력의 탁월함 및 밝은 전략전술과 더불어 조선의 전선이 일본 전선에 비하여 견고하며,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 장악은 의병의 활동과 더불어 불리했던 전국을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