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략

강화교섭의 결렬

명나라의 조선파병이 조선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위기의식에서 왜군의 중국 진출을 막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싸움에 임하는 자세는 조선과는 달랐다.
왜군이 서울로 철수한 뒤에도 명군진영에서는 심유경을 서울의 일본 진영에 보내어 강화교섭을 계속 추진했다. 일본군도 조선 관군의 정비와 의병의 봉기, 명군의 진주, 보급의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하여 4월 18일 서울에서 철수하여 강원ㆍ충청도의 주둔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강화교섭이 진행 중인 6월, 가토ㆍ고니시ㆍ구로다 등의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등이 전사하고 성이 마침내 함락되어 성안에 있던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本營)에 들어간 뒤 2 ~ 3년간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결국 강화교섭은 결렬되었다. 당시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① 명의 황녀로 일본의 후비를 삼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8도 중 4도를 할량할 것,
④ 조선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심유경은 도요토미의 요구가 자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그리하여 1596년(선조 29)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하였으나 자신의 요구안이 아닌 것을 안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다음 재차 조선 침략을 꾀하였다.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하였다는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

일본의 재침

1597년(선조 30) 강화교섭의 결렬로 도요토미는 재침 명령을 내리고, 먼저 가토ㆍ고니시ㆍ소오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을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가토는 울산 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하였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전년 말에 두모포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오래 머무를 계획을 서둘렀다.

한편 조선은 한산도를 통제영으로 삼았는데, 남해안을 지켜오던 통제사 이순신이 무고로 말미암아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월 중순부터 일본군이 속속 바다를 건너오는데 구로다ㆍ모리(毛利秀元)ㆍ시마즈(島津義弘)ㆍ나베시마(鍋島直茂)ㆍ하시수가(蜂須賀家政)ㆍ우키다ㆍ고바야가와ㆍ아사노(淺野長慶) 등 대부분이 임란 당시 침입했던 제장들로 총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이밖에 수군도 전일과 마찬가지로 도오도오ㆍ와키가카와ㆍ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하였다. 이들 일본군은 먼저 동래ㆍ기장ㆍ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ㆍ김해ㆍ진주ㆍ사천ㆍ곤양 등지를 왕래하고 있었다.

이후 4월 일본 수군도 조선 근해로 들어왔는데 조선 수군은 이를 중도에서 공격하려 하였지만 대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당시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미숙한 전술과 무리한 싸움으로 일본군의 전략에 말려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 해전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들도 함께 전사하여 이전에 이순신이 쌓아 놓은 해상 제해권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칠천량해전 소식을 접한 도요토미는 죽도성에서 회의를 열고 육군은 호남ㆍ호서지역을 점령하고, 수군은 전라도 해안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7월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대 5만 병력은 사천을 침입하여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毛利輝元)를 대장으로 한 1대는 역시 5만의 군사로 초계ㆍ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ㆍ전주 방면으로 향했다.

일본군의 진격이 가속화될 즈음 조ㆍ명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으나 일본군이 8월 14일부터 포위공격을 개시하여 격전 끝에 마침내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李福男)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은 50기(騎)를 이끌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갔다. 이에 2천 병력으로 전주를 지키던 유격(遊擊) 진우충(陳愚衷)도 따라서 성을 버리고 패주하여 일본군은 힘들이지 않고 전주를 점령하였다.

전주로 향하던 모리(毛利秀元)의 군은 8월, 안음 황석산성을 지키던 안음현감 곽준(郭雋) 등의 치열한 반격을 받았으나 하루 만에 산성을 함락시키고 모리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전주에서 합류한 왜군 가운데 모리ㆍ가토의 군은 공주를 거쳐 전의ㆍ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의 군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재차 동요하기 시작했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건의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