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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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ㆍ명ㆍ일본 등 동양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패하여 철수했다는 점에서 보면 조선이 이긴 싸움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전쟁터가 조선이고 보면 직접 간접으로 전화의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이었다.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명의 손실이다. 전쟁에 참가했던 관군이나 의병 가운데 전사자와 전상자가 얼마라는 통계는 나와 있지 아니하여 확실한 인원을 알 수 없다. 다만, 왜란 발발 초기 부산진성이나 동래부성이 함락될 때 성안에 있던 군민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나, 금산싸움에서 의병장 고경명과 휘하의 많은 의병과 조헌의 700 의병이 전사한 사실, 그리고 다음해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수만의 군민이 희생된 것으로 보아 그 수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군은 진격할 때와는 달리 철수할 때 더 많은 인명을 살해했다. 특히 일본군이 1593년 4월 18일 서울을 철수하기에 앞서 많은 도성민을 처참하게 살상하였는데, 퇴로마다 그러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들은 싸움에 참가하지 않은 양민들도 그대로 두지 않고 살상을 자행하였으며, 부녀자나 어린아이들까지 살상당하지 않으면 일본에 끌려가서 노비가 되어 사역에 종사하거나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비로 팔리기도 하였다. 이같은 실정이라 조선의 인구는 왜란을 거치면서 급격히 감소했다.

또한 전쟁기간 동안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데다 노동력마저 부족하고 농우도 살아남지 못하여 국토가 황폐하게 되었다. 전쟁 전에 170만 결이던 경지면적이 전쟁 뒤 54만 결로 감소되었다.

난중에 조선민중이 가장 괴로워했던 것 중에 하나는 군량미 조달이었다. 관군도 관군이려니와 더욱 어려운 것은 명나라 원군의 군량미 조달이었다. 당초 명나라는 자국 장졸에게 급식할 군량미를 보내왔으나 의주까지만 운반하고 그 이하는 조선에 운송책임을 떠넘겼다.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고 운송을 감당할 사람이나 장비를 갖추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운송도중에 소모되는 것이 많아서 목적지까지 이르면 정량에 미달하여 명군에게 공급할 군량미는 태부족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 실시한 것이 납속책(納粟策)이었다.

현재의 구국정신 계승행렬 현재의 구국정신 계승행렬

납속책은 납속사목(納粟事目)을 정하고 신분에 따라 미곡을 바치면 그에 해당하는 특권을 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서얼 허통(許通), 향리의 동반직(東班職) 진출,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등 신분상승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으나 민중의 생활고는 극도에 달하여 인상살식(人相殺食)의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난리를 통하여 의식이 새로워진 인사들은 나라에 불평을 하는 군중들을 선동하여 외침중에 내란을 획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갑오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병신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그것에 속한다.

문화재의 손실도 컸다. 경복ㆍ창덕ㆍ창경궁을 위시해서 각 관서가 대부분 소진되었다. 특히 춘추관의 소진은 건물뿐만이 아니라 보관되어 오던 각종의 귀중한 전적(典籍)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실록을 보관하던 지방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탔으며, 민가에 전하는 귀중한 전적과 문서들도 불타거나 왜군이 약탈하여 대부분이 없어졌다.

한편 병제의 재편과 무기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어서 절강무예(浙江武藝)를 조련하게 하고 지방에도 초관(哨官, 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에서도 궁시(弓矢)ㆍ창검ㆍ총통ㆍ완구(碗口)ㆍ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火車)가 발명되었고, 투항해온 왜군들로부터 조총제조와 염초자취(焰硝煮取)기술을 익혀 사전에 활동하였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왜란을 통하여 민중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각하게 되어 자아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는가 하면, 명이 원군을 보내서 조선을 도왔다는 데서 조ㆍ명관계가 밀착하게 되었으며, 숭명사상이 더욱 굳어졌다.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중국에서 군신(軍神)으로 떠받드는 관우의 숭배사상이 전래되어 난후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신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일본이 아니라는 재인식과 함께 적개심이 높아졌으며, 이후 항상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다.

일본

임진왜란 전에 일본은 조선보다 문화적인 면에서 뒤떨어져 조선 문화를 동경하고 열망하였다. 왜군은 조선에 침입하자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문화약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일본에 영향을 미친 조선 문화로는 공예품. 인쇄술. 성리학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예품 중에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자기 제작 기술이었다. 원래 일본의 도자기 제작술은 유치하엿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능가할 만한 도자기 제조 국가로 성장하였다.왜란 당시 일본은 도자기가 형편없이 질이 나빠 조선과 명으로부터 수입한 자기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장수들은 다투어서 자기를 약탈하고, 포로들 중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일본 도자기 제조업은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의 유학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많은 서적과 납치해 간 조선 유학자들에게 의하여 발달하였다. 본래 일본의 학문은 보잘 것 없었으나 조선의 유학이 전래되면서 차차 학문이 발달하여, 성리학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었다. 일본 성리학은 퇴계 이황의 학문 계통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를 납치해 감으로써 문화가 급성장하여 에도 막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명나라

중국에서는 신종(神宗) 때 있었던 영하(寧夏)의 보바이, 파주(播州) 양응룡의 내란 및 조선의 임진왜란을 가리켜 만력(萬曆)의 삼정(三征)이라고 하는데, 이 삼정은 명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이 삼정 중에서도 임진왜란은 군사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으로나 명나라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으므로 국가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의 여진족이 흥기하여 세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청ㆍ명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동양에서 국제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