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해전

부산해전

1592년 4얼 13일 일본의 침략이 있자 당시 경상도의 해안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사 박홍(朴泓)은 도망쳐 버렸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수사 원균도 패주, 도망해 버리자, 수군 만여 명이 모두 해산하였다.
이처럼 수군이 스스로 무너진 것은 왜군의 상륙을 용이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율포만호 이영남(李英男)과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이 원균에게 이곳을 버리면 전라, 충청도도 위태로울 것이라고 항의하면서 호남의 원병을 청해서라도 사수할 것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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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휘하 장수를 소집하여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찬반 양론이 제기되었으나 이순신은 경상도로 출병을 결정하였다. 전라도 수군은 부산포로 오는 도중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으며, 9월 1일 가덕도 북방을 출발하여 부산포로 향하였다. 이때 적들은 부산진성 동쪽 산의 언덕에 삼군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함의 수는 470여 척이나 되었다.

그러나 통분할 일도 있다. 그것은 적군 속에 부역자가 많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9월 1일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에서 승전한 아군은 계속 적을 토벌하려 했으나 중지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군은 기병을 가진 반면 우리 수군은 군마를 갖지 못하였으며, 병력의 숫자도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장기간에 걸친 항해에다 종일토록 항전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피로하여 육지에서 전투하기가 어려웠으며, 날도 저물었기 때문이었다.
9월 1일 가덕도로 되돌아와 밤을 새고, 다음날 연합함대를 해체하고서 이순신의 전라수군은 여수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에 부산포 해전은 막을 내렸다.

부산포 해전은 숫적으로 우리 함대의 수가 적에 비해 3분의 1밖에 안 되었으며, 또 적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군에게는 아주 불리한 여건이었다.
아울러 부산포 해전은 병사들이 오랜 항해로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투로서 임진왜란 해전 중에서 대승을 거둔 승첩 중의 하나였다. 사실 부산포 해전은 전술적으로 적군을 사살하기보다는 적선을 깨뜨리는 데 주력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한 대첩이었다.
이 전투 이후로 일본의 수군은 거의 대부분 와해되고 말았다. 특히 부산포 해전은 전라수군과 경상수군이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는 데도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