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전투

행주산성전투

1593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일본군을 대파시킨 전투이다.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이치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관군과 명군이 평양을 수복, 남진을 속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상,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관군을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설진(設陣)할 것을 원하였으나 막하 장수들의 반대로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하였는데, 이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긴 뒤 휘하병력 가운데서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지금의 시흥)에 주둔하게 하여 서울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도 정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도록 하는 한편 만약의 사태에 대비,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도록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설진, 이때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옴에 따라 이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3천여 명에 불과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태세를 갖추자, 적장들은 이치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 지라 일거에 아군을 멸하여 위험을 배제하자는 결의로 임하였다.
행주대첩 기록화 행주대첩 기록화

이에 이번 출정까지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우키타(宇喜多秀家)를 총대장으로 이시다(石田三成)ㆍ마시다(增田長盛)ㆍ오타니(大谷吉繼) 등을 세 봉행(奉行:통치자 將軍을 보좌하던 최고무관직)으로 하여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누어 전 병력은 3만여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여 왔다.

성 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로는 궁시(弓矢)ㆍ도창(刀槍)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火車),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로 적의 침공에 대처할 수 있었다. 또, 아군의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일시에 몰려올 것에 대비하여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고 토제(土堤)를 쌓아 조총탄환을 피할 수 있게 하였고, 병사에게 재[灰]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일본군이 내침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은 성안의 모든 병사들에게 이번 일전(一戰)이 생사도 중요하지만 국운이 이 한판싸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1593년 일본군의 선봉 100여기(騎)에 뒤이어 제1대장 고니시(小西行長)의 대군이 밀려왔다.

그는 평양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碧蹄館)싸움에도 참전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설욕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제일 앞서 공성(攻城)에 나섰다. 그러나 성 안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震天雷)ㆍ총통(銃筒) 등을 쏘아대고 강궁(强弓)의 시위를 당기니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맞아 혼비백산하니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상태에 빠져 물러갔다.

이어 이시다가 인솔한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하였다. 다음은 제3대의 군이 달려들었는데, 대장 구로다(黑田長政)는 전년 9월 연안성(延安城)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어 장제(長梯)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명을 올려놓고 성 안을 향하여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트리고 또 포전(砲箭)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게 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연패하는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적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하여 선두에 나오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전진, 마침내 제1성책(城柵)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자 관군은 한때 동요하였으나 권율의 독전으로 이를 극복하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사격되어 우키다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 역시 부상으로 후퇴하였다.

제5대장 요시카와(吉川廣家)는 4대의 뒤를 이어 화통(火筒)으로 성책의 일부를 집중 발사, 불이 붙게 하였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버리고 시석(矢石)을 퍼부어 그는 큰 부상을 입고 퇴각하니 그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이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 두 장수는 제2성책을 점령하려고 공격을 가하여 왔다. 이때 처영의 승의군도 용감히 맞서 싸웠는데, 이들은 차고 있던 재[灰]를 적군에게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바꾸어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의 일각을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자 승의군이 동요하기 시작, 급박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대검을 빼어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자 승의군은 다시 돌아서서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한편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으로 맞섰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싸웠으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적이 이것을 알고, 기세를 올리려 하였으나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濱)이 수 만개의 화살을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니 적은 당황, 내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내의 관군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추격하여 적의 목 130급(級)을 베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는데, 아군측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甲冑)ㆍ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이 노획물 가운데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고,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 이상에 달하였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明)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이 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휘하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뒤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행주대첩의 전공이 많이 작용된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