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해전

칠천량해전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참패한 해전이다.

임진왜란ㆍ정유재란중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일본군은 다시 조선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 섬멸하고자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하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하여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무모한 출전으로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등을 잃고 되돌아와 본인은 한산도의 본영(本營)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로 하여금 웅천(熊川)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전선(戰船) 수 십척을 상실하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笞刑)에 처한 뒤 다시 재출전을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기 위하여 삼도수군 160여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 7월 14일 부산 근해에 이르자, 이 사실을 사전에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을 하다가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명을 잃고 칠천량(지금의 거제군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상태에 있었다.

이때 적은 조선수군에 대한 기습계획을 세워 도도(藤堂高虎)ㆍ와키자카(脇坂安治)ㆍ가토(加藤嘉明) 등 수군장수들은 7월 14일 거제도 북방으로 이동한 뒤 15일의 달밤을 이용하여 일제히 수륙양면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령(將領)들은 응전하였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분파(焚破)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 수군의 장수들이 전사하고,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植)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고, 오직 경상좌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방면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수군이 일시에 무너지고 적은 남해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서해로의 진출이 가능하였으며, 우키다(宇喜多秀家)ㆍ고니시(小西行長)ㆍ모리(毛利秀元) 등이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여 겨우 살아나온 김식으로부터 패전의 보고를 접하게 되자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