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성전투

남원성전투

정유재란중 1597년(선조 30) 8월 13일에서 16일까지 남원성에서 벌어졌던 전투이다.

당시 아군은 부총병 양원(楊元),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 모승선(毛承先)ㆍ장표(蔣表) 등이 거느린 명군(明軍) 3천명과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남원부사 임현(任鉉),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 등이 거느린 관군 1천인을 합하여 4천인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일본군은 우키다(宇喜多秀家)ㆍ고니시(小西行長)ㆍ하치스타(蜂須賀家政)ㆍ시마스(島津義弘)ㆍ가토(加藤嘉明) 등이 거느린 5만6천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1597년 7월말경, 일본군의 대병력이 북상하자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호남의 관문인 남원에 병력을 집결시켜 이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이에 양원으로 하여금 명군 3천인을 이끌고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임현과 함께 남원에 가게 하고, 또 유격장(遊擊將) 진우충(陳愚衷)으로 하여금 전주를 지키면서 남원전투를 돕게 하였다.

같은 해 8월 6일에는 이원춘이 남원성에 들어왔으며, 8일에는 문안사(問安使) 오응정이 그대로 남아서 방어사를 겸하였다. 이어 12일에 이복남이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別將) 신호(申浩) 등과 합세하여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원성에 들어왔다. 13일에는 고니시의 주력부대가 도착하니 양원은 이신방과 함께 동문을 지키고, 모승선은 서문, 장표는 남문, 이복남은 북문을 각각 지키게 하였다.

전투는 이날 밤부터 시작되어 16일에는 성이 함락되었다. 남문을 돌파한 일본군과 대혼전이 벌어져 이복남ㆍ이신방 등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전사하였고, 양원만이 겨우 성을 탈출하였다.
한편, 전주성의 진우충은 남원에 구원병을 보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남원성의 함락 소식을 듣자 성을 버리고 달아남으로써 일본군은 남원을 거쳐 전주를 무혈(無血)로 점령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