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과 화살

활과 화살(弓矢)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궁술(弓術)을 중요시하였으며, 화포가 출현하기 전까지 궁시는 가장 주된 전투무기의 하나였다. 조선 전기에는 이미 화약무기가 크게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병기로서 궁시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그 이유는 화약무기의 보급이 일반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술은 화약무기의 여러 가지 결함을 보완시켜 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왕조는 사대부의 소양 가운데 하나로 활쏘기를 강조하였다. 활쏘기가 덕(德)을 함양하는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武科)에 있어서도 궁시는 가장 기본적인 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궁시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거의 답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용도가 커서 주요 전투무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무소뿔을 이용해서 만드는 각궁(角弓)과 통아(筒兒)라는 대롱 속에 넣어 쏘는 자그마한 편전(片箭)은 사정거리가 1,000보에 이르고 철갑을 뚫는다는 위력 때문에 조선의 대표적인 병기로 유명하였다.
활은 그 모양과 재질, 용도, 크기, 세기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리는데, 대체로 정량궁(正兩弓), 예궁(禮弓), 목궁(木弓), 철궁(鐵弓), 철태궁(鐵胎弓), 각궁(角弓)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각궁이다. 무소뿔, 참나무, 소힘줄, 실 등을 복합적으로 붙여 만든 각궁은 그 탄력성이 매우 강하여 같은 크기의 외국의 활이 따르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각궁의 길이는 126㎝였고, 사정거리는 약 2백 보에 달하였다.

화살은 화살촉과 살대, 깃, 오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살대는 대나무, 오늬는 싸리나무로 만들고, 깃은 꿩과 같은 새의 깃털을 썼으며, 화살촉은 주로 쇠로 만들었으나 연습용 화살에는 나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화살 조선시대 화살

화살 종류로는 나무로 만든 목전(木箭), 화살촉을 쇠로 만든 철전(鐵箭),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예전(禮箭), 가장 짧은 화살 편전(片箭), 그리고 대우전(大羽箭), 세전(細箭), 유엽전(柳葉箭), 주살, 동개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박두(樸頭), 철전, 유엽전, 편전 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살로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채용되기도 하였다.

이밖에 전투시 화살을 꽂아 두며 사용하는 화살주머니 시복(矢箙), 얹은 활을 넣어 두는 활집인 궁대(弓袋), 그리고 연습 내지는 수렵시에 사용하며 화살을 보관하거나 휴대할 때 가지고 다니던 전통(箭筒) 등이 있다. 때론 시복과 궁대를 결합한 것을 동개라고 부르기도 하며, 시복만을 동개라 하기도 한다. 특히 전통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궁사들의 운치와 멋을 살리기 위해 용무늬, 꽃무늬, 십장생 등 각종 문양을 넣기도 하였고, 재질도 목제, 죽제, 지승제, 지제 등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또 활을 잘 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보조도구가 필요로 하는데, 활촉을 바로잡는 데 사용하는 촉돌이개와 시위줄을 당기는 데에는 깍지 등이 그것이다. 그 외도 활을 쏠 때 시위가 팔을 칠 때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썼던 완대(腕帶)라든가 줌통을 잡는 데 쓰는 활장갑 등이 있다. 이러한 보조도구들을 살수건(矢巾)에 싸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편전(片箭)

편전은 일명 ‘애기살’이라고 하는데, 화살의 길이가 작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전은 작아 가벼운 대신 가속도가 커서 관통력이 컸고, 강한 관통력은 보병전은 물론이고 기병전에서도 크게 활용되었다. 또 편전은 천 보 이상의 거리까지 날아가 적을 맞추었기 때문에 조선의 가장 중요한 비밀병기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북방의 야인에게 편전의 제작방법이 알려질까 봐 함경도 지방에서는 편전 훈련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편전은 그 중요성 때문에 조선시대 무관을 선발하는데 시험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편전을 쏘는 방법은 조금 특이하다. 갈라진 대롱처럼 생긴 통아에 편전을 넣어 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편전은 화살의 길이가 작아 일반 활의 시위에 얹어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통아가 발사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편전 (수노기) 편전 (수노기)

쇠뇌(弩)

쇠뇌는 활을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발전시킨 무기로서, 활이 많은 힘과 기술, 그리고 연습이 필요한 데 비해 비교적 사용이 쉽게 만들어진 무기였다. 또 적으로부터 몸을 들어내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고, 전통적인 활에 비해 정확하며, 화살도 전통 활보다 더욱 무거운 화살을 발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연속 사격시 활보다 발사 속도가 느린 것이 단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널리 사용하였는데, 전투에서 활과 쇠뇌를 적절히 배합 사용하여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팔우노, 숙질노, 숙질구궁노, 천균노, 강노, 대각노, 차노 등이 있었다.
쇠뇌 (궐장노) 쇠뇌 (궐장노)

사실 쇠뇌는 우리나라 보다 중국측이 더 많이 활용하였다. 중국은 쇠뇌를 육전에 있어서의 주요 전투무기로 간주하여 그 종류도 다양하였고, 그 사용도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쇠뇌를 훌륭한 무기로 인정하였으나 널리 일반화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쇠뇌는 매복이나 복병(伏兵)할 때 활용도가 높아 조선시대에는 북방 야인의 침입로에 배치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성종때에는 이극균(李克均), 이말(李末) 등이 새로운 양식의 쇠뇌를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이말의 쇠뇌는 기존의 장기인 통아 쏘는 방식을 쇠뇌에 이용하는 독특함과 기존의 쇠뇌들이 갖추지 못한 기능이 첨가된 양질의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중종때에도 서후(徐厚)가 강노, 극적궁 등의 쇠뇌를 개발하는 등 계속 발전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쇠뇌는 임진왜란 때 주요 전투에서 사용하여 큰 효과를 보기도 하였다. 낙동강 연안에 매복한 의병들이 쇠뇌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기도 하였으며, 또 진주성, 평양성, 경주성 전투 등에서 사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특히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은 연노(連弩)와 진천뢰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경주성을 탈환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실학자들이 쇠뇌의 사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다양한 종류의 쇠뇌가 개발되어 조선 말기까지 화기의 느린 발사속도를 보완키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