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

곽재우(郭再祐) 1552(명종 7) ~ 1617(광해군 9)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출신.

황해도관찰사 월(越)의 아들이고,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김우옹(金宇#옹19)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그뒤,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고,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의병장 곽재우 의병장 곽재우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으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남쪽 창암진(滄巖津:솥바위나루)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양45衛副護軍)에 제수되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양45衛上護軍)에 승진하였다.
그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ㆍ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ㆍ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하였다.
1612년(광해군 4)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ㆍ창녕ㆍ영산ㆍ진주까지를 그의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하여 위장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 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곽망우당 유품 곽망우당 유품

수십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천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척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현풍ㆍ창녕ㆍ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진주성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ㆍ영산ㆍ창녕ㆍ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그는 또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죽은 뒤에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