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권율(權慄) 1537(중종 32) ~ 1599(선조 32)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이며,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ㆍ감찰ㆍ예조좌랑ㆍ호조정랑ㆍ전라도도사ㆍ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하였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하였다.

즉,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권율 영정 권율 영정

그러나 주장인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하여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李詩之)ㆍ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였으나, 오직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하여 후사를 계획하였다.

한편, 남원에서 1천여명의 의군을 모집하여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에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체찰사 정철(鄭澈)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돌아가 관내(管內)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잠시 주저하였으나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받고 북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앞서 용인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대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營柵)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기병 1천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많은 왜병을 베었다.

그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하여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하여 행주산성을 택하였다. 조경에게 명하여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시하였다.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그는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그는 행군중에 휘하병 가운데 4천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지금의 始興)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휴정의 고제(高弟)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 1천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 미만이었다.

그뒤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적장들은 이치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성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하여 멸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행주산성을 공격한다는 결의를 제장(諸將)의 중론으로 정하고 조선침입에서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본진장령(本陣將領)들까지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하였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백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冑)ㆍ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하였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그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하여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어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휴전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하였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ㆍ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하였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