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김시민(金時敏) 1554(명종 9) ~ 1592(선조 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 목천(木川) 출신.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훈련원판관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성민을 안무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ㆍ진해ㆍ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ㆍ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ㆍ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김시민 영정 김시민 영정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요청을 받고 정병 1천여명을 이끌고 이에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방식을 모방하여 염초(焰硝)5백여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하였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중에 영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적과의 싸움에 대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 800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 며칠 뒤에 진몰(陣歿)하였다.
죽은 뒤 성중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하였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에 추록되었으며, 영의정이 추증되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ㆍ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