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일

김천일(金千鎰) 1537(중종 32) ~ 1593(선조 26)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시호는 문열(文烈). 나주 출신.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된 뒤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ㆍ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지평(持平)때에 상소를 올려 시폐를 극론하다가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뒤 담양부사ㆍ한성부서윤ㆍ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하였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그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ㆍ양산숙(梁山璹)ㆍ박환(朴#환08)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백명을 모아 북으로 출병하였다. 한편, 공주에서 조헌(趙憲)과 호서지방 의병에 관하여 협의하고는 곧 수원에 도착하였다. 북상할 때 수원의 연도에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와 또 호서방면에서 모집한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군세는 사기를 떨쳤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전개, 유격전으로 개가를 올렸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8월 전라병사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제수되고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았다.
강화도에 진을 옮긴 뒤 강화부사ㆍ전라병사와 협력하여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하여 전투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강화도는 당시 조정의 명령을 호남ㆍ호서에 전달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9월에는 통천(通川)ㆍ양천(陽川)지구의 의병까지 지휘하게 되고 매일같이 강화연안의 적군을 공격하였으며, 양천ㆍ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다.

한편, 전라병사ㆍ경기수사ㆍ충청병사, 추의병장(秋義兵將) 우성전(禹性傳) 등의 관군 및 의병과 합세하여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적군의 원릉(圓陵) 도굴행위도 막아 이를 봉위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 개성으로 진격할 때 이들의 작전을 도왔으며, 명ㆍ일간에 강화가 제기되자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어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자 선편으로 쌀 1천석을 공급하여 구휼하였다. 전투에 있어서도 경기수사ㆍ충청수사와 함께 선유봉(仙遊峯) 및 사현전투(沙峴戰鬪)에서 다수의 적을 참살, 생포하고 2월에는 권율(權慄)의 행주산성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진하여 참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장기간의 전투에서 4백여명의 적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때 명ㆍ일강화가 추진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ㆍ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하여 1차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월 14일 3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이들 합세한 관군ㆍ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하였으나 끝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가증(加贈)되었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천집 松川集》ㆍ《건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