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신립(申砬) 1546(명종 1) ~ 1592(선조 25)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입지(立之). 시호는 충장(忠壯).

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보다 무예닦기를 좋아한 그는 23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ㆍ도총관ㆍ도사ㆍ경력(經歷) 등의 벼슬을 거쳐서 외직인 진주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문장가로 이름난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으로부터 거친 성격을 고칠 것을 종용받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목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기도 하였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니탕개(尼湯介)가 거느린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여 훈융진(訓戎鎭)을 공격하자 첨사 신상절(申尙節)이 위급함을 듣고, 유원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 등과 합세하여 적병 50여명을 목베고 이어 적군을 추격, 두만강을 건너가서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또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에 침입한 야인들과 같은해 5월 종성에 쳐들어온 이탕개의 1만여 군대를 물리쳤다.
신립장군 묘 신립장군 묘

그는 평상시에 철기(鐵騎) 500여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그 민첩함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야인들이 모두 감복하였으니, 이때 육진(六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용맹 때문이었다. 이 북방의 전승이 보고되자 조정에서는 1584년 3월에 그를 함경도북병사로 임명하고, 남철릭(무관의 公服의 하나)ㆍ환도(環刀)ㆍ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하사하였으며, 그의 노모에게는 매일 고기와 술을 보내고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1587년 2월 왜선 18척이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임명되어 군관 30명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철수한 뒤라 돌아오던 중 양가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도남병사로 다시 임명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야인부락에 출정, 적병 20명을 목베고, 말 세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해 10월에는 갈파지보(乫波知堡)의 수졸(戍卒)이 보장(堡將)을 맞대놓고 욕한 죄로 목베어 죽였기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한직으로 전보되었다.
1590년 2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내직인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항상 군비(軍備)의 부족함을 논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삼도순변사로 임명하고 보검을 하사하였다. 그는 특청하여 유성룡(柳成龍)의 막하에 들어가 부장 김여물(金汝#물01) 및 80명의 군관과 시정백도(市井白徒) 수백명을 모병하여 충주로 떠났다. 이어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으로 내려가 지형을 살폈다.
이때 군관 60여명과 군졸 4, 000여명을 이끌고 남하하였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경상도 상주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쫓겨와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여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일의 재주를 아껴 용서하고 오히려 선봉장으로 삼았다.
이일은 왜군의 정세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대군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여물 등이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잠복하여 전투를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넓은 벌판에서 기병의 활용을 극구 주장하여 군대를 돌려 충주성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彈琴臺)로 나아가 배수진을 치고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이해 4월 28일에 배수의 진을 친 아군을 향하여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옴에 따라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아군의 힘을 믿고 미처 피난을 하지 않았던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였으며, 아군이 섬멸되자 그는 김여물ㆍ박안민(朴安民) 등과 함께 남한강물에 투신, 순절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