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

유정(惟政) 1544(중종 39) ~ 1610(광해군 2)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ㆍ송운(松雲)ㆍ종봉(鍾峯).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7세를 전후하여 할아버지에게 《사략 史略》을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黙)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자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20세 연장인 박순(朴淳)과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당시의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ㆍ《장자》ㆍ《문자 文子》ㆍ《열자 列子》와 시를 배웠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이듬해 해인사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휴정의 곁에서 도를 닦다가 1578년부터 팔공산ㆍ금강산ㆍ청량산ㆍ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그뒤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는데,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류되었다는 모함을 입어 강릉부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사명당 영정 사명당 영정

이듬해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던 중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천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다. 또한, 제2차회담(1594년 7월 12 ~ 16일)ㆍ제3차회담(1594년 12월 23일)ㆍ제4차회담(1597년 3월 18일)에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5조약의 모순성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 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또한, 1595년에는 장편의 을미상소를 올렸는데,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적 안목과 현실을 적절히 파악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ㆍ금오산성(金烏山城)ㆍ용기산성(龍起山城)ㆍ악견산성(岳堅山城)ㆍ이숭산성(李崇山城, 또는 美崇山城)ㆍ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1594년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였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석을 비장하였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 奮忠#서33難錄》 1권 등이 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