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

이순신(李舜臣) 1545(인종 1) ~ 1598(선조 3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서울 출생이다.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 이듬해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ㆍ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定罪)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添兵)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고, 1589년(선조 22) 선전관ㆍ정읍현감(井邑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15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ㆍ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이충무공 영정 이충무공 영정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唐浦)에서 20척, 당항포(唐項浦)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고 7월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다시 가토 요시아키[加嘉明]의 수군을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었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本營)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ㆍ난민구제ㆍ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파직되어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이에 앞서 명ㆍ일 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混戰)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또한 격퇴함으로써 한국 민족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ㆍ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봉되었으며, 좌의정(左議政)이 추증,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葬地)는 아산(牙山)의 어라산(於羅山)이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忠武)의 충렬사(忠烈祠), 여수(麗水)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이 중 현충사는 성역화되어 전시관 등을 건립,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저서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