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원

김명원(金命元) 1534(중종 29) ~ 1602(선조 35)

본관은 경주.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

아버지는 대사헌 만균(萬鈞)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현감 준의(尊義)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명종 13)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61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 저작(著作)ㆍ박사(博士)에 승진하였으나, 이량(李樑)에게 미움을 사 형 경원(慶元)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량이 쫓겨나자 다시 부수찬이 되었으며 헌납ㆍ지평ㆍ교리ㆍ수찬 등을 역임하고, 1568년 함경도의 군무를 순안할 때 산천의 형편을 두루 다니며 살펴보고 요해지(要害地)의 방비 등을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다음해 종성부사가 되고, 그뒤 동래부사ㆍ판결사ㆍ형조참의ㆍ나주목사ㆍ정주목사를 지냈다. 1579년 의주목사가 되고 이어 평안병사ㆍ호조참판ㆍ전라감사ㆍ한성부좌윤ㆍ경기감사ㆍ병조참판을 지내고, 1584년 함경감사ㆍ형조판서ㆍ도총관을 지냈다. 1587년 우참찬에 승진하였고, 이때 왜구가 녹도(鹿島)를 함락하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이를 퇴치하였다. 이어 형조판서ㆍ경기감사를 거쳐 좌참찬으로 지의금부사를 겸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로 한강 및 임진강 방어에 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막지 못하고 적의 침공을 지연시키는 데 그쳤다. 평양이 함락된 뒤 순안에 주둔, 행재소(行在所) 경비에 힘썼다. 이듬해 명나라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에 응했고, 그뒤 호조ㆍ예조ㆍ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하였고, 좌찬성ㆍ이조판서ㆍ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병서와 궁마(弓馬)에도 능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