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 ~ 1611

일본의 장수로 1562년 나카무라[中村]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명(兒名)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는 6촌간으로,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아래서 성장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의 시동을 지내며 많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合戰]에서는 뛰어난 활약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과 더불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이후 규슈[九州]의 히고[肥後] 남부에서 25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임명되었다.
배를 타고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 배를 타고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방면으로 출병하여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울산싸움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과 갈등을 빚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섭정을 맡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戰鬪]에서 동군(東軍)인 이에야스 측에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宇土城)을 함락시켰다.
이후 구마모토[熊本] 대영지(大領地)의 세습영주가 되어 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오사카성[大阪城], 나고야성[名古屋城]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名城)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축조하였으며, 정치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다가 1611년 8월 2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