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 1600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대표적인 천주교도 영주이며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부른다.
사카이(오사카 부근)에서 약재상을 운영하던 집안의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小西隆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관을 지냈다. 고니시 류사는 명나라와 무역으로 서양문물을 일찍 접하게 되었으며 독실한 천주교도가 되었다. 그의 차남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1584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혼노지의 변란 이후로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아버지 류사와 함께 세토나이 해의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총책임이 되었다.
1588년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 히고노쿠니 우토 성의 영주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1만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1진으로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포성을 함락하고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묘 정면에서 바라보는 모습 고니시 유키나가

이후 일본군의 선봉장이 되어 대동강까지 진격하였고 6월 15일에 평양성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1593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원군에게 패하여 평양성을 불지르고 서울로 퇴각하였다. 전쟁이 점차 장기화되고 명나라를 정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조선의 이덕형과 명나라 심유경 등과 강화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명나라와 강화를 위한 교섭에 노력을 계속하였지만 그의 강화교섭 계략이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정복야욕을 더욱 자극하였다.
1596년 강화교섭이 최종 실패로 끝나자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 왔으며 남원성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을 격퇴하고 전주까지 무혈입성 하였으며 순천에 왜성을 쌓고 전라도 일대에 주둔하였다.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철군명령이 내려지자 노량해전이 벌어지는 틈을 이용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1600년 일본의 정국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자 이를 저지하려는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과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戰鬪]가 벌어진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미쓰나리에 동조하여 싸우다가 패하였다. 고니시는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할복자결을 거부하고 효수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