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다 히데이에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3 ~ 1655

일본의 장수로 오가야마죠오의 성주였다.
전국시대의 무장이었던 아버지가 8세때 죽어 도요토미의 양자가 되어 성장하였고, 도요토미의 측근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과 결혼했다.

임진왜란 때는 19세의 나이로 일본군 총사령관이 되어 서울에 있으면서 전 일본군을 지휘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좌군의 총지휘자가 되어 남원성을 공략하여 8월 15일에 함락시키고, 일본군 부대장들을 전주에서 모아 회의를 하고 일제히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군량이 없어 다시 전라도로 후퇴, 1597년 9월 11일 용안에서 부대장들을 모아 전라도의 각 지역에 배치하였다.
9월 13일 금구에 배치된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대가 조선 의병의 결사적인 공격을 받자 전라도는 불안해서 있을 곳이 못된다고 판단, 용안회의의 결정을 백지화하고, 9월 16일 정읍에서 회의를 열고 더 안전한 전라도 남쪽으로 부대 배치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우기다 부대는 장흥, 보성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일본 수군이 명량해협에서 대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키다 히데이에 묘 정면에서 바라보는 모습 우키다 히데이에 묘

이후 전라남도에서도 안전하게 주둔할 곳이 없어 20일 정도 있다가 경상도 해안가로 이동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여러 영주들이 두 파로 양분돼 천하대권을 놓고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戰鬪]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여 동경 남쪽 하지조지마에 유배되어 83세로 생애를 마쳤다.

우기다 가문은 단절되어 그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이 하나도 없다. 그는 임진, 정유재란에 걸쳐 조선의 문화재를 가장 많이 약탈하였는데, 현재 그 문화재가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