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구루시마 미지후사(來島通總)

명나라 장수.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좌도독으로 명나라 군사를 인솔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경기, 황해, 경상우도 등 각지 병마절도사들과 연합하여 1만 3천 명의 병력으로 남진, 사천에 이르러 시마즈(島津義弘)의 왜군을 공격하다 참패하여 거창으로 철수했다. 1599년 서울로 올라온 뒤 1600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마귀(麻貴)

명나라 장수. 일찍이 무관이 되어 영하총병이 되었고 명나라 연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우도독으로 요동성에 있던 중,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군제독이 되어 원군을 인솔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왜군이 남해안 각지에서 북상하자 도원수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연합하여 울산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원군으로 인해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전사 1천 4백, 부상 3천 명을 냈다. 이듬해에도 왜군과 싸웠으나 크게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심유경(沈惟敬)

절강성 출신. 본래 상인출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ㆍ일 양국간에 화의의 조짐이 있자 스스로 강화교섭을 자원했다.
신기삼영 유격장군의 자격으로 평양으로 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강화를 시도하여 일본에 가려 했으나 개인적인 교섭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듬해 다시 강화교섭의 조짐을 보이자 사신으로 뽑혀 고니시와 만나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회견을 갖고 일본측의 강화조건을 듣고 왔다.
1596년 명나라 측의 회답을 갖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히데요시는 명나라의 책봉에 분노하여 강화는 결렬되었다. 이처럼 교섭이 결렬되었으나 심유경은 거짓으로 화의의 성립과 히데요시의 일본 국왕 책봉 수락을 전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모든 사실이 탄로났으나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다시 화의를 시도했으나 이것마저 결렬되자 일본에 투항하려고 했다.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양호(楊鎬)

명나라 장수. 1597년 정유재란 때 경략조선군무(經略朝鮮軍務使)가 되어 총독 형개, 총병 마귀, 부총병 양원 등과 원병을 거느리고 조선에 입국했다.
울산성 싸움의 패전의 책임으로 황제로부터 처형명령이 내려졌으나 주위로 변호로 피할 수 있었다 .

이여송(李如松)

명나라 장수. 자 자무(子茂). 호 앙성(仰城).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 1592년 닝샤[寧夏]에 발배(틋拜)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제독(提督)으로서 이를 평정하였다.
같은 해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2차 원군으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을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벽제관싸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에 패한 후로는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교섭 위주의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해 말에 철군하였다. 하지만 평양탈환의 전공으로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승진되었다. 1597년 요동 총병관(總兵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토번(土蕃)의 침범을 받아 반격 중에 전사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5대조는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 사람으로 성주(星州) 이씨(李氏)의 후예라 하며, 당시 조선 주둔중에 조선인 부인을 맞아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자손들이 지금도 경상남도 거제군에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