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덩력 장군이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된 사연

김덕령 장군이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된 사연

전라도 광주 일대에서 효자로 소문난 김덕령(金德齡)이 스물두 살 때였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었는데, 당시 경상도 진양땅 자매실(지금의 수곡면 자매리 자매 마을)에 명의(名醫)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김덕령은 밤새 삼백 리 길을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러나 명의는 "광주로 가려면 닷새나 걸리는데 당신 어머니는 워낙 위중해 내일이면 죽을 것이오." 하면서 도와주기 어렵다고 하였다. 김덕령은 그 말에도 명의를 계속 설득했고, 김덕령의 효심에 감동한 명의는 결국 같이 가겠다고 했다. 김덕령은 명의를 안고 말을 타고는 호랑이처럼 달려 다음날 정오에 집에 닿았다. 명의의 처방을 받은 김덕령의 어머니는 중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진주성포루 옆에서 바라보는 모습 진주성포루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명의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진주로 달려왔다. 그리고 자매실 앞산에 진을 치고 왜구를 무찔러 은혜를 갚았다. 자매마을 서쪽 문서골에는 그 명의의 의서(醫書)와 침을 감추어 둔 것으로 전해지는 당새기 바위가 있다. 그 명의의 이름은 김남(金楠), 혹은 유이태(劉以(爾)泰)라고 한다.

자매마을의 복지산에는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이 쌓은 성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금산면 월아산 장군대에도 목책을 쌓아 진을 친 곳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도 없고, 1978년 월아마을 입구에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