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연의 효성

김득연의 효성

와룡면 지내2리 창골(倉谷)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는 중용암(中庸巖) 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중종때 와룡면 이상리에 김득연(金得硏)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가야리에 살고 있는 부친 김언기(金彦璣)를 매일 찾아뵙고, 문안을 드렸다. 그는 집을 떠날 때 무료함도 달랠 겸 중용을 외우면서 갔다. 집에서 출발할 때 외우기 시작해서 가다보면 중간 지점인 지내2리에 있는 창골까지 가면 암송이 끝났다. 그리고, 부친을 뵙고, 돌아갈 때도 중용을 외웠는데 집을 나오면서 외우기 시작해서 이 곳 창골에 이르면 끝이 났다. 이 상리에서 가야리까지는 6㎞나 되는 먼 거리였지만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부친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또 중용을 암송했다.

그는 훗날 생원 진사시(生員 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님께 매일 문안드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군량미를 모아서 관군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의 훌륭한 공적을 인정받아 집의(執義)라는 벼슬에 나갔으나 그 때는 이미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후손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창골에 있는 높이 5m, 너비 15m나 되는 커다란 바위에 중용암(中庸巖)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놓고, 그의 효성을 기리고 본받아서 주위 사람들을 감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