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장수의 무례함을 혼내준 대성전의 대들보

명나라 장수의 무례함을 혼내준 예천 대성전의 대들보

예천향교는 흑응산 동쪽 송대언덕에 있는 조선시대 공립학교로 초창년대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656년 군수 심유행, 1658년 군수 이휘조 등이 수차례 중건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건물로 보이며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동소문으로 공자 5성과 국내 8현을 비롯한 23성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정유년에 명나라 마귀(麻貴)라는 장수가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예천 고을에 주둔하려고 하니, 많은 군대를 수용할 만한 큰 건물이 없어 공자 위패를 모셔 놓은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에 장졸들을 데리고 들어오려 하였다. 아무리 명나라 군사가 우리 나라를 도와준다고는 하나 그 당시 유림들은 자기네의 생명보다 더 떠받들어 모시는 공자님의 위패가 있는 대성전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며, 마장군(麻將軍)에게 몇 번이나 만류하면서 다른 장소로 정하자고 간청하였으나 무인(武人)인 마귀에게 대성전이 금기의 장소로 통할 까닭이 없었다. 유림들은 부득이 대성전 안에 모신 공자님의 위패를 위시한 모든 위패들을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옮기었다.

이때 마장군은 휘하에 많은 장졸을 거느리고, 위세 당당히 앞장서서 대성전 안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앉자마자, 갑자기 대성전 안에 있는 몇 아름이 넘는 굵고 큰 대들보가 벼락치는 소리를 내면서 뒤틀려 돌아갔다. 대들보의 뒤틀리는 소리에 그렇게도 거드럭거리던 마장군은 혼미 백산하여 단걸음에 대성전을 뛰쳐나와 달아나고 말았다. 대성전 대들보가 너무 굵고 커서 평소엔 그 안쪽을 볼 수 없었으나, 뒤틀어지는 바람에 그 안쪽을 살펴보니 군수 이광준(郡守 李光俊)이라고 쓴 글자 다섯 자가 보였다고 한다. 마장군이 달아난 후 대들보는 안쪽으로 되돌아가서 차츰 제자리에 놓이게 되면서 뒤틀어질 때 보였던 글씨도 그 후로는 보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때 뒤틀려졌던 흔적이 대들보에 남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