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무심암

청도군 무심암

매전면 관하천 하류 동창천과 합류지점 못 미쳐 하상에 몇 개의 바위덩이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북지리에 살던 성씨 미상의 젊은 남편도 구국의 일념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유독히 금실이 좋았던 부부라, 이별을 하면서 전쟁이 끝나면 이 바위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남편을 싸움터에 보낸 젊은 아내의 심사가 좋을 리가 없었다. 동산의 달을 보아도 남편의 생사가 걱정이 되고, 언덕위에 피는 달개미꽃에도 신혼 꿈이 되살아나고, 처마 밑을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남편의 발자국소리 인양 깜짝 놀라기가 일수였다. 보는 이의 애간장이 끊어질 것 같은 안타까움이 날로 더해 가기만 하였다. 뜰에 나 있는 한 포기의 풀에도, 흩어져 있는 한 개의 돌에도 남편의 환상이 아로새겨지는 번뇌와 그리움에 지새고 있었다.

세월은 어느 듯 8년이 흘러서 난리가 끝났다는 백성들의 안도의 숨소리가 나기 무섭게 약속한 바위에 달려가서 남편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고, 한 해가 두 해되고, 두 해가 거듭되어도 그리운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저귀는 새소리도 여울을 감아도는 물소리도 님의 소식인가 귀를 기울여도, 보고픈 사람의 그림자는 볼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요, 기다림의 괴로움이였다. 정회의 회포는 한겹 두겹 쌓이고, 단장의 애수는 깊어만 갔다. 남편의 환상은 자나깨나 아롱이고, 소식은 무소식이 거듭되니 너무나도 한이 되어 죽음을 연상케 했다. 임자없이 들녁에 피어있는 들국화가 너무나도 자신의 신세와 흡사하여 한웅쿰 꺾어서는 눈물어린 눈으로 몇날을 바라보다가 어느 짧은 가을날 저녁 노을에 물든 냇가에서 남편의 죽음을 예감하고서는 손가락을 깨물어 선혈로 뚜렷이 무심암이라 쓰고는 투신 자살하였다. 아내가 죽은 후에도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후인들은 이 바위에 물을 뿌리면 희미하게나마 붉은 피 글씨를 읽을 수 있었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이 바위를 무심바위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