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의무기

조선시대의 무기는 크게 재래식 병기화약병기로 나눌 수 있는데, 재래식 병기로는 활과 화살, 쇠뇌, 창, 도검, 타살무기 등을 들 수 있으며, 화약병기에는 소형화기와 대형화포, 비격진천뢰 같은 폭탄, 로켓형 화기인 신기전과 다연장발사기인 화차가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삼국(조선, 일본, 명)이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를 총동원하여 싸운 국제전쟁이다. 전쟁 초기에 이전까지만 해도 무기의 선진국이라 자처했던 조선은 일본의 조총 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육상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수군의 연승과 의병들의 활약, 명군의 지원 등을 바탕으로 전란을 극복할 수 있다. 조선이 전란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조선의 우수한 무기체계도 한 몫을 하였는데, 한민족의 대표적인 장기인 활을 비롯하여 쇠뇌, 대형화포, 화차, 비격진천뢰, 신기전, 거북선ㆍ판옥선으로 대변되는 전함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화살 천자총통

그 중에서도 고려 말부터 지속적으로 개량해온 대형 화포는 16세기 중반에 조선이 외세의 침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임진왜란에서 그 위력을 여실히 드러냈다.

육전에서 조선군이 연패를 거듭하면서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구가하여 국난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하였다. 여러 측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대형 화포의 우수성 또한 그중의 하나였다.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에는 천자총통 ‧ 지자총통 ‧ 현자총통 ‧ 황자총통 ‧ 별황자총통 등의 대형화포가 장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검

도와 검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개인 휴대무기 가운데 대표적인 단병기이다. 도는 날이 한쪽에만 있으며 곡선의 형태로 자루가 길면서 칼집이 없고, 주로 베어서 살상효과를 냈다. 반면 검은 날이 양쪽에 있으며 형태는 직선으로 도에 비해서 자루가 짧고 칼집이 있다. 검은 베는 것 외에도 찔러서 살상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선사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도검은 기본적으로 전투용 무기이면서 동시에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고 벽사(辟邪)의 기능도 수반한 의기(儀器)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둥근고리칼(環頭大刀)에는 둥근 고리 안에 금ㆍ은의 귀금속을 사용하여 다양한 장식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도검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궁시에 밀려 보조적인 수단으로 전락하여 전투용의 주기능보다는 호신용 내지는 의장용의 기능에 머물렀다. 이는 당시 기본적인 전투 방식이 성곽을 위주로 한 수성전술이었기 때문에 화약병기와 궁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반면에 도검과 창의 활용도는 낮았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검으로는 환도, 예도, 인검, 운검, 칠성검이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환도(環刀)인데, 이 환도는 모든 병사에게 지급된 개인 휴대무기이지만 그 용도가 백병전에서 최후로 자신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는 호신용 무기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도검은 도검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칼날 구조, 가볍고 견고하면서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된 칼집 등에서 중국, 일본 도검이 따라올 수 없는 실용과 예술성이 가미됐다고 할 수 있다.

활과 화살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궁술을 중요시하였으며, 화포가 출현하기 전까지 활과 화살은 가장 주된 전투무기의 하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장기라 할 수 있다.
우리 활의 전통은 고조선시대로부터 이다. 화약병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활은 원거리 무기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무기였다. 동이족(東夷族)으로 불린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궁시를 가장 중히 여겼고, 가장 대중적인 무예 역시 활쏘기로 이를 가장 장기로 여겼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좋은 활을 만들었으며, 이를 사용한 명궁의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오늘날에도 비록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양궁에서 보여주고 있는 한국인의 저력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투무기이면서 사냥에 필요한 도구였던 선사시대 이후 활은 점차 자신을 보호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도구로서 그 활용도가 높아졌던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활 쏘는 기마 무사라든가 군사 행렬 속에 포진해 있는 궁수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활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고구려의 맥궁(貊弓)은 중국의 역사서《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 화살 조선시대 화살

이러한 활의 전통은 이민족과의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 조선시대 까지도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미 화약무기가 크게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병기로서 궁시에 크게 의존하였고, 더구나 조선왕조는 사대부의 소양 가운데 하나로 활쏘기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에 있어서도 궁시는 가장 기본적인 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특히 물소의 뿔을 이용해서 만드는 각궁과 통아라는 대롱 속에 넣어 쏘는 조그마한 편전은 사정거리가 1000보에 이르고 철갑을 뚫는다는 위력 때문에 조선의 대표적인 병기로 유명하였다.

창은 긴 장대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이다. 창은 원래 긴 장대를 이용하여 내뻗는 힘으로 적을 살상시키는 무기였기 때문에 원래 평지에서 사용될 때에 보다 그 효용성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화약병기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평지에서의 근접전의 주무기는 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창은 선사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기 시작되었으며, 화약병기가 등장한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무기라 할 수 있다. 사냥 도구가 아닌 전투용 창은 청동기시대부터 전장에서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각 시대의 전투방식에서 필요한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창이 만들어졌고, 같은 창이라도 시대에 따라 용도 면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창은 전투용과 의장용으로 구분되어 발달하였다. 의장용으로 사용된 창으로는 극과 기창이 있었고, 전투무기로서의 창에는 기병용의 기창과 보병용의 창이 있었다. 특히 창술을 무과 시험과목에 들어 있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무과 초시 및 복시의 기창 시험에 사용된 창의 길이는 15척 5촌이었고, 무게는 30근이었다. 그러나 이 기창은 그 크기가 커서 무사들 중에도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였기 때문에 실제 전투용으로 사용된 창은 이보다는 훨씬 가벼웠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 일반 병사들이 기본적으로 휴대하고 있었던 무기는 바로 이러한 창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일반 번상 농민병의 무기를 국가가 준비하여 지급한 것이 아니라 농민 스스로 각자 마련토록 하였다. 국가는 농민병에게 도검류나 혹은 궁시류와 같이 재정적 부담이 컸던 무기류의 무장 요구가 곤란하자, 이 보다는 재정적 부담이 적었던 창으로 무장시켰던 것이다. 그나마 창술이 무과 시험과 일반 병사를 뽑는 시취(試取)에 포함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창은 전투무기로서 손색이 없었으나,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군사들이 장비하였던 창은 장기간의 평화로 무기에 대한 관심을 떨어졌고, 또 자루 길이도 짧아져 전투용으로서의 기능이 상실한 상태라 외국인의 눈에 비웃음이 될 정도였다.
다만 창술은 장병술(長兵術)의 발달로 인해 궁시에 비해 그 비중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창술이 어느 정도는 발달해 있었던 것 같다. 스페인 신부 루이스 데 구스만은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선교사들의 「1592년 일본 연례보고서 부록」을 참고하여 “꼬라이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짧고 두께가 얇은 칼을 사용하며 미늘창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도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라고 당시 조선군이 창을 매우 잘 다루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약병기

우리나라에서의 화약과 화약병기 개발은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려 말 한반도는 왜구의 노략질의 대상으로 큰 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이 왜구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최무선이 생각한 최선의 방책은 해상에서의 원거리 화공작전이었다. 그는 이런 화공작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화약과 화약병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노력하여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하였고, 또한 여러 화약병기를 제조해서 왜구 토벌전에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불안으로 화기가 반대세력의 군사적 저항에 악용될 것을 우려하여 현상유지에 그쳤지만 점차 왕권이 안정되면서 다시 개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최무선의 화약과 화기 제조술이 그의 아들인 최해산으로 전승되었고, 화약병기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ㆍ개발되었다.
특히 세종은 북방의 4군 6진 영토 개척을 위해 화약과 화기 개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추진하였다. 세종은 재임기간 중에 대대적인 화기 개량을 단행하였는데, 그 주목적은 화기에 쓰이는 화약을 적게 쓰고,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기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실전에서의 화기의 등장은 궁시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 화기를 이용한 화살의 발사는 화살의 사거리를 증대시켰으며, 한꺼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게 하였다. 나아가 화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굉음과 불이 수반될 때에 그 효과가 더욱 컸다.
조선이 화포의 제작과 운용에 있어서 특별히 중점을 두었던 기능이 바로 굉음소리였다. 외국 사진을 접대하는 경회루 만찬때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의도적으로 천지를 진동하는 포를 쏘았다. 그러면 그들은 혼비백산해서 상 다리 밑이라도 숨으려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에 조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가지도록 유도한 것으로 상대방에 대한 살상 의도보다는 위협과 경고성에 중점을 둔 생명 존중의식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세종대에 이르면 화약을 적게 쓰면서 다량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화기 사격법에 대한 개혁도 이루어져 사격을 하는 사수와 장전을 해주는 보조의 분업을 통해서 사수는 보다 전문화된 기술로 화기의 전술적 운용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되어 조선의 화약과 화기 제작기술은 국제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화기제작 기술에 대한 지나친 통제책,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에 따른 무사안일한 국정 운영으로 인해 화약과 화기 기술에 관한한 선진국이었던 조선은 점차 후진국으로 전락하였다.
현자총통 조선시대 화살

이후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 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육상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소지한 조총의 성능이 월등하기도 했지만,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한 조선군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연전연승을 구가하였는데, 이는 조선 수군이 천 ‧ 지 ‧ 현 ‧ 황자총통 등 우수한 대형화포를 거북선과 판옥선에 장착하여 운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형화포는 대형 화살(箭)과 다수의 탄환을 발사하여 원거리에서 적선을 격파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지녔던 것이다. 당시 일본 수군이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뱃전을 붙이고 백병전을 편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전함의 전후좌우에 각종 화포를 장착하여 함포전술을 구사하였다. 따라서 조선군이 사용한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육전과는 달리 조선 수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