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의 종류

수영의 종류

통제영
통제영이란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삼도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을 말하는 것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한산진영(현 한산도)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통제영은 이순신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한산도에 처음으로 설치된 후 제2대 통제사인 원균 때 한산도 본영이 왜적에 의해 유린되자 거제현으로 옮겨졌다가 1604년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옮겨졌다. 이후 통제영은 1895년(고종 32년)에 폐지될 때까지 조선 수군의 최고 통치 관청으로서 기능하였다.
경상좌수영
경상좌수영은 한반도 동남해안인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해상방어를 담당했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진영이다. 처음에는 동래현 감만이포에 설치되었으나 일본인의 내왕이 잦은 곳이라 조선 태종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가 1592년(선조 25)에 동래 남촌으로 옮겨 왔다. 그 뒤 1635년(인조 13)에 선창이 좁고 모래가 쌓여 선로가 불통하므로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감만이포가 왜관과는 수로로 10리도 안되므로 군사상의 기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어 1652년(효종 3)에 남촌의 옛터인 오늘의 수영으로 옮겼다. 이후 1895년(고종 32) 7월 군제개편으로 좌수영이 혁파되기까지 240여 년간 현재의 위치에 존재하였다.
좌수영은 조선후기 삼남지방의 수군 5영 체제에서 좌영에 해당되었는데 수사 주관의 추조와 통제사 주관의 춘조로 나뉘어 훈련을 하였다. 추조시의 수군편성은 군선 60여척과 수군 3500여명이 동원되었으며 중앙의 병력은 우후가, 좌우익의 주력은 부산첨사와 다대첨사가 담당하였다.
전라좌수영
전라좌수영은 1479년(성종 10년) 전라도수군절도사영이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으로 분리되면서 약 84년간 내려오던 내례만호진이 혁파되고 그 곳에 전라좌수영이 자리 잡아 전라도서남해안 좌측의 해상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임진왜란시에는 조선수군의 주력이었던 전라좌수군의 본영으로서 해상의병의 근거지였으며, 1895년(고종 32년)에 혁파될 때까지 400여 년간 조선 수군의 주진으로서 남해안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진영이 설치될 당시 수군영의 대체적인 면모는 갖추었겠지만, 『난중일기』에 의하면 1591년에 충무공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면서 한층 체계적으로 제반 시설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1773년을 전후하여 좌수사 이영수에 의한 성곽 및 관아의 대대적인 중창으로 영성의 면모는 한결 일신되었다. 1847년(헌종 13)의 『호좌수영지』에는 전라좌수영의 영성과 병력, 군미, 병기 등이 상당한 규모로 기록되고 있어서 조선후기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수군영으로서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전라우수영
해남에서 부안까지의 서해안을 경비했던 전라우수영은 진도를 바라볼 수 있는 명량 해협과 해남의 남단 화원 반도에 접해 있고, 울돌목이 앞으로 펼쳐져 있다. 고려말 1377년(우왕 3)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이 설치된 뒤, 조선 1440년(세종 22년)에 현재의 위치인 해남 황원관에 옮겼으며, 1465년(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ㆍ개편되었다. 당시 이곳은 해남현으로 부터 서쪽으로 70리, 진도군으로부터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현지에 위치하였으며 성종대(1479)에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따로 설치된 후 이곳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본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으나, 임진왜란시 한때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전시에 있어서 군사적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1597년 정유재란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칠천량해전에서 패전한 이후 남은 소수의 병력과 영내의 남녀노소를 총동원하여 명량에서 서쪽으로 상륙을 시도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 중 최대의 전과를 거둔 명량대첩으로, 명량은 본영의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급조류의 해협으로 천험의 관방을 이룬 곳이다.
충청수영
조선시대 보령현에 속했던 오천면 소성리 일대는 회이포라 불렀으며, 수심깊은 천수만 연안에 위치한 천연적인 요새지로 백제때는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신라를 거쳐 고려조에 이르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군선을 두어 지키다가 조선시대에는 충청수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금강하구에서부터 평택까지 방비했던 충청수영이 명실상부한 체제를 갖추어 설치된 것은 1447년(세종 29년)인 듯하다. 세종때에 왜구의 대마도 정벌과 함께 수군의 제도를 더욱 강화하여 해상침략에 대비하여 충청수영의 체재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396년(태조 5년)에 고만(현 주교면 송학리)에 군영을 설치하고 수군첨절제사를 두었고 그후 회이포에 옮겨졌다. 이후 1466년(세조 12년)에 충청수군절도사로 승격하였고 1895년(고종 32년)에 각도 수영이 폐지될때 충청수영도 폐영되었다.
시기별 수영의 위치
시기별 수영의 위치
조선전기
(『세종실록지리지』, 1454)
조선전기
(『경국대전』, 1485)
조선후기
(『속대전』, 1744)
  • 평안도 - 삼화 범도포
  • 충청도 - 보령 대회이포
  • 전라도 - 무안 대굴포
  • 경상도 - 동래 부산포, 거제 오아포
  • 경기도 - 화지량(남양)
  • 충청도 - 대회이포(보령)
  • 전라도 - 순천(여수), 해남
  • 경상도 - 개운포(울산), 가배량(거재)
  • 통어영(경기 교동)
    • 황해도 - 옹진
    • 경기도 - 교동
  • 통제영(경남 통영)
    • 충청도 - 보령
    • 전라도 - 전남 여수, 전남 해남
    • 경상도 - 부산 동래, 경남 통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