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출전

주요현황

1차출전 해전현황
전투명 일시 장소 전과
옥포해전 1592. 5. 7 경남 거제시 옥포 26척 격침
합포해전 1592. 5. 7 경남 마산시 5척격침
적진포해전 1592. 5. 8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일설은 덕포리 적덕마을)
13척 중 11척 격침

전투개요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은 판옥선(板屋船) 24척, 협선(挾船)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의 총 85척을 이끌고 첫 출전을 했다.

이렇듯 전선의 숫자는 열악했지만 전라좌수영에는 이순신 외에도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다.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전부장 홍양현감 배흥립,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등의 용맹한 장수들이 자기 소속의 전선들을 거느리고 전후좌우를 호위했으며, 여도권관 김인영, 사도첨사 김완은 좌우 척후장으로 맨 앞에 섰고, 본영 군관 최대성은 한후장, 배응록은 참퇴장으로 그 뒤를 따랐다.
상황도(옥포, 합포, 적진포해전)

이순신은 이와 같은 부하 명장들소비포 앞바다에서 첫날밤을 지낸 뒤, 당포로 내려가 원균 휘하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합류하고 5월 7일에 옥포만(玉浦灣)에 도착했다. 잠시 후 먼저 나갔던 척후선이 그곳에서 왜적들이 있는 곳을 발견했고, 병사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이를 본 이순신은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정중하기를 태산과 같이 하라.”
이와 같은 군령에 따라 전군은 침착하고 질서정연하게 함대를 몰아 30여 척의 왜선들을 향해 다가갔다.

왜적들은 옥포의 관청과 여염집을 가리지 않고 가옥에 불을 지르며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함대를 발견한 왜적들은 당황하여 모두들 배를 타고 달아났지만, 감히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한 채 기슭을 타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적들은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로 충전한 군사들의 공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적선들은 한 척씩 부서지면서 가라앉았다.
해군사관학교에 있는 옥포해전도 모습 옥포해전도 - 해군사관학교

이 첫 전투에서 왜군들은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고, 조선 수군들은 단 1척의 배도, 단 1명의 병사도 잃지 않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첫 번째 승리가 바로 옥포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전라도 장수들이 왜선 21척, 경상도 장수들이 왜선 5척, 합하여 26척의 적선을 전멸시키고, 우리 함대는 이곳을 떠나 승전고를 울리며 거제도 북쪽 끝에 있는 영등포(永登浦 : 거제군 장목면 구영리)를 향하여 북상을 한 뒤, 숙영을 준비했다.

그 때 척후선으로부터 왜선 5척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다시 함대를 몰아 합포(合浦)까지 적들을 뒤쫓아 들어갔다.

겁을 집어먹은 적들은 노를 빨리 저어 합포 앞바다로 들어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도망을 쳤다. 조선 수군은 포구 안으로 들어가 적선 5척은 모두 태워버리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제 1차 출전 중의 두 번째 합포해전이다.

이순신은 합포에서 승리를 거두고, 함대를 돌려 남포로 내려와서 밤을 재내며 이날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다음 날 5월 8일, 아침 일찍 척후장으로부터 왜적이 있다는 첩보를 듣고 곧바로 출항했다. 전 수군이 출동하여 통영 고을 광도면 적진포(赤珍浦 : 고성군 거류면 당동 남촌포)에 도착하니, 적선 13척이 바다 어귀에 정박해 있고, 적병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 여염집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조선순군 함대를 발견한 왜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배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쳐버렸다. 조선 수군은 일제히 화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들어갔다.
이곳에서 왜선 2척은 도망치고, 나머지 11척은 모조리 격파해 없앴다. 이것을 제 1차 출동 중의 세 번째 적진포해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