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 출전

주요현황

5차출전 해전현황
전투명 일시 전과
웅포상륙작전 1593. 2. 6 ~ 4. 3
2. 10
2. 22
2. 28
3. 6
2. 10 웅포공격
2. 22 웅포공격 : 전선 2척 전복
2. 28 웅포공격 : 비격진천뢰 함상 장착
3. 6 웅포공격 : 사천출신 조선 여인 포로 구함

전투개요

1593년 1월, 이순신은 두 차례에 걸친 선조의 유서(諭書)를 받았다. 하나는 1월 22일에 받은 유서인데, ‘명나라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 황해도 그리고 한성을 차례로 수복을 하려고 진군을 하면 왜군들이 도망갈 것이므로, 수군을 지휘하여 왜군의 귀로를 차단하고 전멸하’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3일이 지난 25일에 받았는데, ‘1월 8일, 이여송이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 진군하니 수군을 정비하여 해전으로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유서 내용을 소속 각 진포에 알리는 동시에 1월 30일까지 모두 전선을 동원하여 본영 앞바다에 집결하도록 하고, 아울러 전라우수사와 경상우수사에게도 합동으로 출전할 것을 전달했다.
이순신은 2월 3일로 정하고 소속 수군을 집결시켰고, 6일 출전하여 7일 견내량에서 경상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합류했다.
상황도(웅포상륙작전)

2월 8일 3도의 수군을 편성한 이순신은 온천량에서 이틀을 정박하고, 10일 온천량을 출항하여 바로 웅포로 향하였다.
이 웅포야말로 우리 수군이 부산진 해상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해안의 요새였으므로, 왜병은 수군은 함대를 선창에 정박시킨 채, 선창 안 동서쪽 산기슭에 진지를 만들고 있었다.
원래 왜적들의 주기지는 안골포였으나, 이 지역은 바다 쪽으로 너무 뾰족이 나와 있어 조선수군에게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육상에서 지원을 받기에 어려웠던 까닭에 새로운 기지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배를 쉽게 감출 수 있고, 또 육상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웅포로 이동했던 것이며, 부산을 수비하는 해상의 제 1선 주진지로 정한 곳이었다. 이순신이 부산포에 있는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우선 웅포에 은거한 적들을 공격해야 했다.
그러나 왜적들은 이순신 함대와의 해전을 피하고, 이순신 함대를 보기만하면 달아나, 그들이 쌓아놓은 성안에서 몰래 다니기만 하면서 전혀 바다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왜적들은 주로 산기슭의 성을 이용하여 그들의 전선을 엄호하면서 조총을 쏘아댔다.

웅포 앞바다에 이르러 포구 안쪽을 살펴보니, 포구 깊숙이 줄을 지어 감추어 둔 전선이 있었고, 소굴이 많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순신은 이를 보고 난 뒤에, 삼도의 수군을 은폐하고서 먼저 경쾌선을 내보내어 왜적선을 포구 밖의 바다로 꾀어서 끌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왜적들은 겁을 집어먹고 나오지 않았다.
12일 새벽에 다시금 삼도 수군을 지휘하여 웅포에 이르러 왜군에게 공격하다가 물러나는 등 유인전술을 감행했으나, 역시 왜적들은 전날처럼 조총만 쏠 따름이었다. 이 날도 이순신은 통분한 심경을 간직한 채, 칠천도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10일과 12일 이틀간의 유인작전은 비록 큰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바다에서 육지의 왜성에다 포경을 함으로써 왜적을 더욱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 해상포격으로 육지에 있던 왜군의 사상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칠천도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에게는 “지상군의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빨리 웅천을 공격하여 주시오.”하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고, 다음 작전을 짜고 있었다.
우리의 지상군이 웅천을 공격한다면, 왜적들은 바다로 몰려서 나오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군이 바다로 나오기만 하면 쳐부수는 데는 어렵지 않겠지만, 과연 왜군을 어떻게 하여 바다로 나오게 하는가 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17일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경상우수가 원균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선전관(宣傳官)이 유서(諭書)를 갖고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진으로 돌아왔다. 유서를 받아보았더니 “명나라 군사들이 평양을 회복하고, 한성을 향하고 있으니, 급히 적들의 되돌아갈 길을 차단하고 몰살시켜라.”하는 내용이었다.
이 유서는 사실상 1달 전에 있었던 육상의 전황을 알리는 것이었으나, 육전에서 별로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이순신에게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으며, 그가 고심하고 있던 웅포 공격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넣어 준 것이다.

18일 이순신은 모든 함대를 이끌고 웅천에 이르러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왜적들은 여전히 싸우려들지를 않고, 이순신 함대의 동정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이순신은 이때까지 고민해 왔던 대로 왜적선은 바다로 나오지 않았고, 우리 지상군의 후방지원도 없었다. 그래서 수군 단독의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우선 유인작전부터 폈다.
이순신은 사도첨사 김완(金浣)을 복병장으로 삼아, 여도만호· 녹도가장 · 좌별도장·우별도장·좌돌격장·우돌격장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복병을 시켰다. 나머지 여러 전선을 포구 안으로 드나들게 하며 왜선을 꾀어서 나오게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왜적선이 먼저 이순신 함대를 만만히 보았던지, 왜선 10여 척이 뒤따라 나왔다. 이순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인하러 갔던 전선이 물러 나오는 순간을 잡아 먼저 복병선으로 하여금 10여 척의 왜선을 에워싸게 하면서 여러 총통을 쏘게 하였다. 복병선들은 재빨리 공격했다.
왜적선들은 갑자기 공격을 받고 포위되는 꼴이 되었다. 왜적선은 조금만 더 지체하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 것 같아 재빨리 포구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때 좌별도장 이설과 좌돌격장 이언량 등은 도망치는 왜선 중에 3척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배에 타고 있던 왜병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다만 전선만은 포구 안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왜적의 육상공격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사로잡지는 못하였다. 이 웅포에 대한 수군 단독 상륙작전의 전단계 작전은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왜적의 사기는 크게 꺾여서 아무리 유인해도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순신은 모든 전선들은 사화랑으로 옮겨와 일단 쉬게 하였다.

이번 웅포 상륙작전에서도 사실상 지상군의 협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왜군들을 몽땅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이순신은 왜병들의 사기가 저하된 기회를 이용하여 수륙합동 공격을 단행하려고 두 번째로 경상우도 순찰사에게 지상군의 웅천공격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찰사의 답장은 “곽재우로 하여금 먼저 창원을 토벌하게 하고, 차차 웅천을 진격하게 한다.”는 연락을 받고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함대를 소진포로 옮기게 하여 다음 날 20일까지 이순신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새로운 작전을 논의하였다.

22일 웅포 앞바다에 이르러, 첫째 이순신이 모집하여 거느린 두 승장(삼혜·의승)과 의병장 성응지는 서쪽의 제포로 상륙한다. 둘째 삼도의 전선 가운데서 변변치 못한 것을 골라 동쪽의 안골포로 상륙하게 한다. 셋째 삼도의 수군 가운데서 경쾌선을 각각 5척씩 뽑아 모두 15척으로써 주력부대를 편성하여 웅포로 돌진한다.
넷째 나머지 전선들은 주력부대의 뒤를 따른다.
이러한 이순신의 상륙작전 계획은 왜적의 세력을 견제 또는 분산시키면서 웅포에 있는 왜적의 저항력을 약하게 하여 포구 안에 깊숙이 감추어 둔 전선을 공격하려는 것이었고, 그의 빈틈없는 계획에 따라 작전은 착착 종일 계속되었다.
주력부대는 돌진하면서 지자·현자총통을 계속 쏘니 왜적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죽이고 다치게 하였다. 이순신은 사전에 계획한 대로 동·서로 상륙한 의승병과 사수들도 창과 칼을 휘두르며, 또 활과 총을 쏘아 왜병을 닥치는 대로 사살하였다.
그러나 웅포의 왜적들은 육상에다 진지를 튼튼하게 쌓았기 때문에 그들을 전멸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왜군들은 그들의 진지를 이용하여 항전하며 지구전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격전 속에서 왜적들은 진도 지휘선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이 때 용감한 군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아주 비겁한 군사들도 있었다.
원균의 부하인 좌부장과 우부장은 포위된 진도 지휘선을 못 본 체하는 바람에 겨우 위급을 면한 순간도 있었다.
이 날 소진포로 되돌아온 이순신은 치열했던 이 날의 전투를 회상하며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 날부터 이순신은 악천후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웅포 등지의 왜적을 견제하면서 28일에도 웅포를 공격했고, 3월 6일에도 다시 웅포를 공격하였다. 이때는 전라좌수영을 떠나온 지도 오래되었으나, 화약과 포환 등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했기 때문에 최대한의 화력을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적들은 전과 같이 산기슭의 진지에서 응사는 하면서도 포구 밖의 바다로는 나오지 않으므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육전에만 사용되었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전선에 장비하여 활용해 보기도 했다.
산기슭의 진지를 향하여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자, 왜적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들의 사상자들을 끌고 도주하는 것이었으나, 역시 해상에서 육지를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비격진천뢰로써도 견고하게 쌓여진 방어진을 무력화시키기에는 힘들었으며, 그 속에서 항전하는 왜적을 섬멸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3월 10일에는 사량 해상으로 물러나 화공(火攻)을 준비하였으나 왜선을 모두 태운다면 왜적들의 화가 백성들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취소하였다.
더구나 기다리고 있던 명나라 지원군은 소식이 없었고, 2개월이 넘는 오래된 전투로 병사들은 지쳐있었다. 또한 식량·화약 등의 군수품의 보급이 급했기 때문에 4월 3일을 기하여 삼도의 합동함대를 해체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