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전술

당파(撞破)란 적선을 충격하는 것인데, 우리나라 당파전술(撞破戰術)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중엽, 여진의 침입이 잦을 때 전선의 뱃머리를 철각으로 하여 쾌속을 이용한 당파전술로 여진의 해적선을 격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전선은 조선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여 태종 때에 이미 거북선이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이미 당파용으로 운용되었으리라 판단된다. 당시는 화포가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전용 화포까지 전선에 장착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화포전은 없었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기록에도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어…”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거북선은 당파용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임진왜란 시기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돌격선인 거북선에는 화포가 장착됨으로써 화포에서 발사되는 피사체에 의한 적선의 당파가 일반적인 전술형태로 정착되었다. 즉, 이전에는 전술자체가 화포전이 드물었기 때문에 적선을 당파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화포전이 주류를 이룸으로써 당파전술의 위력은 한층 돋보였던 것이다. 특히 거북선을 중심으로 한 당파전술은 1592년 5월의 사천해전을 필두로 하여 여러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사천해전에서는 이순신의 유인작전에 말려든 일본 수군이 사천 앞바다에 나오자 신속히 조선 수군이 회항하여 적을 포위하였다. 동시에 거북선은 적진 깊숙이 돌입하여 적선에 충격을 가해 격침시킴으로써 큰 전과를 거두었다.
당포해전 때에도 “거북선은 적 기함에 바싹 다가가서 용머리를 치켜 올리고 현자포를 방사하였다…적선을 부딪쳐서 당파하자”라고 하였고, 부산포해전에서는 공격목표를 적군 사살보다도 적선을 격파하는 데 두어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매 전투마다 거북선과 판옥선에 의한 당파전술은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조선 수군이 당파전술로 적선을 격침시킬 수 있었던 것은 판옥선과 거북선이 적선보다 견고했음과 탑재 무기의 성능 면에서 우월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순신은 이러한 피아간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토대로 당파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