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해전

한산도 해전은 1592년부터 1598년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 기간 중에 벌이진 해전 중에 규모가 크고 중대한 해전이었다.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지휘아래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해 온 것이었다. 토요토미는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을 침략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야심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 한산도대첩 이후에 일본군들은 조선 침략 전략을 바꾸어야 했으며, 전쟁의 양상이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역사적 배경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
조선왕조는 1392년에 건국된 이래로 왜와 200년 동안 사신을 교류를 하였으며,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두 나라를 둘러싼 정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의 통치자가 되면서 바뀌게 되었다.

1500년대에 일본은 전란 중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 간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일본을 통일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통일 이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을 침략할 기회가 자신에게 왔다고 여겼다. 그는 동아시아의 지도가 새겨진 부채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이러한 야망을 구체화 시켰다고 한다.
한산도해전도 한산도해전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을 침략하여 정복한 첫 번째 일본의 통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지방 영주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고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자신의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587년에 그는 대마도를 정복하여 대마도 영주로 하여금 한양으로 가서 조선 조정에 명나라를 침공 하고자 하니 길을 열어달라는 자신의 뜻을 밝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마도 영주는 그 당시 조선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사실대로 조선 조정에 알릴 수 없었다. 대마도 영주는 한양에 가서 조선 조정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청하였다.

조선 조정은 1590년에 통신사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일본으로 갔던 통신사는 토요토미의 서한을 들고 돌아 왔다.

이 편지에서 토요토미는 명나라를 치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다시 강력한 어조로 밝혔다.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은 왕께 서로 다른 의견을 피력하였다.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가망성이 크다고 한 반면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전쟁준비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통신사가 돌아온 이후, 조선 조정은 일본 침략 가능성을 제고하여 침략에 대한 대비를 하였다고 한다. 하여, 남부지방에 지방관인 감사를 새로 임명하고 이들을 파견하였다. 새로 임명된 감사들은 무기를 준비하고 성을 축조하였다. 이때 많은 성들이 경상도에 새로 건조되거나 다시 지어졌다. 새로운 병영도 지어졌다.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조선 조정은 수군 사령관들도 새로 임명해 나갔다. 1591년 2월에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고 이억기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초에는 원균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새로 임명된 수군 사령관들은 각자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 중에서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대비하여 완벽에 가깝게 준비를 하였다. 그는 많은 양의 무기, 화약, 군량을 준비하였으며 거북선 3척을 비롯한 새로운 전선도 건조하였다.
일본의 침략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약 160,000명의 일본군이 이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약 8천의 조선군은 이에 맞서야 했다. 일백년 동안 이어진 내전으로 다져진 일본군은 조선군을 맞아 매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강력한 조총으로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조선군 또한 화약무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육박 전투에서는 대부분 칼, 창, 화살로 대응하였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대규모 일본군의 침략사실과 계속된 패전 소식을 접한 후, 당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올려 이로 인해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신립장군을 국왕의 특사격인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남부로 파견하였다. 신립 장군은 일본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충주에 있는 탄금대에서 대면하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신립장군의 패배 이후 일본군의 북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4월 30일에 선조는 한양을 떠나 피신하였고, 이틀 뒤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하였다.
일본군 조총 일본군 조총

한산도 해전 전후의 상황

계속되는 해전에서의 승리

해전에서의 양상은 육전과 달랐다. 조선 수군은 전라도의 수군을 중심으로 경상도의 수군과 연합하여 일본 수군을 계속하여 격파하여 나갔다. 한산도해전 이전에 조선 수군은 약 7번의 전투에서 일본 수군과 대전하여 이를 모두 이기었다. 이러한 조선 수군의 승리는 훈련으로 단련된 수군이 있었고 조선의 전선이 화포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같은 뛰어난 장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군 판옥선 조선군 판옥선
사실,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침략 전략에서 애초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 장군들에게 되도록 많은 배를 구축하여 많은 병력을 운반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즉, 일본군의 침략 전략은 대부분 육지에서의 전투와 성 건조에 있었던 것이다. 해전에서 계속 패전을 거듭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 장수들에게 수군 전략을 바꾸도록 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일본 수군은 연합하여서 조선 함대에 맞서기로 하였다. 일본 수군은 진해에 있는 안골포, 웅포 등지에 성을 쌓고 전투를 준비하였다.

일본 조정에서 수군을 연합하여서 출전하라고 하였으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혼자 출병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전쟁 초반에 수군 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제대로 된 해전을 해보지 못했던 차였다. 1592년 7월 7일 와키사카는 함대를 이끌고 항구를 떠났다. 와키사카의 함대가 거제도 인근 바다에 도착하여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을 즈음에 조선 함대는 미륵도에 있는 당포에 있었다.
함대와 사령관
한산도 해전 전후의 상황 : 함대구성과 사령관
조선함대 일본함대
사령관 전라좌도 수군통제사 : 이순신
전라우도 수군통제사 : 이억기
경상우도 수군통제사 : 원균
와키사카 야스하루
함대 54척 73척
전투내용
7월 7일에 한 백성이 조선 함대에 찾아와서 일본 함대가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 조선 수군은 회의를 열어 전략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견내량 앞바다가 좁아서 판옥선의 방향을 바꾸기 어려웠고,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면 육지로 도망하였으므로, 일본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격파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8일 조선 함대는 5~6 척을 견내량 앞바다로 보내어 유인토록 하고, 나머지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기하였다. 견내량에 이른 조선 함대의 분대는 먼저 공격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배에 올라 대응 사격하였다. 조선 함대의 분대가 퇴각할 것처럼 행동하자, 일본함대가 이를 쫓았다.

조선함대의 분대는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한산도에 있던 조선 함대에 합류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그의 유명한 전법 중 하나인 학익진을 펴서 공격에 나섰다. 조선함대는 학이 날개를 편 것과 유사하게 전열을 가다듬었고 일본 함대를 둘러쌌다. 조선함대는 유인되어 들어오는 일본 함대에 공격하여 초반에 2~3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조선함대는 먼저 적의 대장선을 공격하여 적의 명령체계를 무너뜨린 후 공격에 박차를 가하여 일본 전선을 격침시켜 나갔다. 대부분의 일본 전선들이 조선함대의 전선에 접근하기 전에 격침되었으며 전투는 2~3시간 만에 끝이 났다.
전투결과
일본 함대의 피해는 전례에 없는 것이었다. 일본 함대는 총 73척 중 59척의 전선을 잃었다. 이 배의 정원을 감안하여 추측해 보건데 약 3000명의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조선함대는 배를 잃지 않았고 사상자 또한 미비하였다.

한산도해전의 영향

조선은 한산도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세 가지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첫 번째로, 조선은 풍족한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군량미 확보는 조선군에게 이어서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두 번째로, 조선함대를 무력화하려는 일본의 시도가 실패했으며 이로 인해 일본군의 침략전략이 변화되어야 했다. 일본군은 원래 조선의 바닷길을 확보하여서 북진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 무기와 군량미를 제공하며 명나라를 침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산도 해전에서 패하면서, 이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북진해 있었던 일본군들은 배고픔과 보급품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군은 명을 치기 위해서 반드시 이들에게 음식과 보급품을 댈 보급로가 필요했으나, 육로 또한 조선 육군과 의병에 의해서 차단되었다. 많은 평민들과 스님들로 이루어진 의병들이 일본군을 공격해 왔던 것이다.

세 번째로, 일본군이 더 이상 북진이 어려워져, 명나라가 육지로 참전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가 명에 원군을 요청하여, 명나라 군대가 참전을 하게 되었다.

한편, 한산도 해전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까지 남해 바다를 지켜냈고,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내었다. 1598년 8월 18일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측근들은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몇 달 후, 이 사실은 밝혀졌으며 일본 조정은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군의 퇴각을 명령하였다. 1598년 11월 19일에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일본으로 돌아가던 일본 함대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약 200여척의 전선을 잃었으며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이 전투 중에 이순신 장군은 총상으로 죽게 되었으나, 그의 마지막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은 조선,명연합함대의 승리로 끝났다. 노량해전 후, 잔존해 있던 일본군이 부산을 떠나면서 임진왜란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삼국, 즉 조선, 명(중국), 왜(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국토는 7년여 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 되었으며 많은 유물이 일본군에 의해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비록 전란의 피해를 재건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으나 전쟁 후에도, 조선왕조는 4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조선왕조와 달리, 명나라와 왜의 통치자였던 토요토미의 치세는 끝을 맞게 되었다. 명나라는 전쟁 이후에 경제가 쇠퇴하고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이 계속 일어났으며, 1644년에 여진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여진족은 이후 중국의 마지막 절대왕정 국가였던 청나라를 세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시절, 지방 영주였던 토구가와 이예야스는 토요토미의 정부를 전복하고, 에도-지금의 도쿄-로 수도를 옮기고, 에도 막부시대를 열었다. 토구가와는 1607년에 조선에 다시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이 응하면서 두 나라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신을 교류하였다. 조선은 통신사로 불리는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통신사는 500여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중에는 사신을 비롯하여 화가, 도공, 의사 등이 포함되었다. 일본은 이 통신사를 통하여서 조선의 신기술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특히,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의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참고자료

방송자료
  • 불멸의 이순신 : KBS 드라마, 2004.
  • 역사스페셜 : KBS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서적
  • 징비록 : 유성룡, 김홍식, 2003
  • 임진왜란 해전사 : 이민웅, 2004
  •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 노승석, 2005
  • 세계를 바꾼 50인의 전쟁영웅(50 Military leaders who changed the world) : 윌리엄 웨어(William Weir), 2007
  • 이순신 병법을 논하다 : 임원빈, 2005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