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옥선의 활약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지휘 하에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면서도 또한 완벽한 것이었다.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24회의 해전에서 일본 군함 700척을 격침시키고 23척을 나포했던 반면, 전투로 인한 군함 손실은 사실상 한 척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자 역시 매 해전에 있어서 십 수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이러한 완벽한 승리의 원인을 이순신 개인의 탁월한 전략ㆍ전술적 능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하지만 그 외에도 군함과 화약 무기로 대표되는 해상 무기체계에서 조선이 일본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러한 무기 체계상의 우위를 100% 발휘할 수 있도록 전력을 조정하는 면에서 탁월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인 판옥선이 일본 수군의 주력 군함인 아다케부네(安宅船), 세키부네(關船) 등에 비해 어떠한 점에서 우수하였는지를 살펴보겠다.

1차 출전에서의 활약

조선 수군이 벌인 첫 해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25일 만에 있었던 옥포해전이다. 이순신은 5월 4일 출전하여 5월 8일 옥포만에서 적 선단을 포착 26척을 격침시켰다. 이때 상황을 충무공은 장계를 통해 선조에게 보고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옥포해전에서는 판옥선 28척과 협선 17척, 포작선(어선) 46척을 거느리고 출동 하였다. 이때 포작선과 협선은 전열함으로 볼 수 없으며 실제 전투 시에는 판옥선이 주력이 되어 싸웠다. 또한 판옥선의 위력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전투에 소요된 시간인데 장계를 보면 옥포앞바다에서 12시였고 전투를 마친 뒤 영등포에 철수한 시간이 오후 4시경이었으니 대략 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1시간 정도였다. 그 사이에 조선 수군은 단 한사람의 부상병도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 시켰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 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해전에 뒤이어 같은 날 저녁 5척을 또 추격 격침시켰고, 적진포에서 13척을 추가로 격침시켰다. 이것이 충무공의 1차 출동이다.

2차 출전에서의 활약

5월 29일에 이루어진 제 2차 출동에는 23척의 전선이 출동한다. 이때는 거북선이 3척 따라가게 된다. 이순신은 이때 이후 판옥선과 거북선을 함께 전선이라고 부르고 출격 때에도 전선의 숫자만 장계에 보고하고 있다. 사천포에서 일본의 층루선 12척과 왜성을 쌓고 있는 일본군 400명을 분멸시키고 다시 당포에서 판옥선만큼 큰 왜 층루선 9척, 중소선 12척을 모두 격침 시키고 일본 장수의 목을 베었다. 이후 당포 근처에 머물던 조선 함대에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합세하여 전선이 모두 51척으로 늘어난 연합함대는 당항포, 율포 등에서 적선 72척을 격침시켰다. 다만 이때에는 전상자가 전보다 많아 사망자가 12명이나 되고 부상이 34명이나 되는데 이순신 함대에서 최초로 적의 칼에 의한 사망자도 1명 나오게 된다.

3차 출전에서의 활약

3차 출동인 한산도 해전에서 적의 대형 층루선 35척, 중간 배 17척 작은 배 7척 등 총 53척을 격침시켰으나 조선 측은 부상자 118명에 사망 19명 뿐 침몰한 배는 한척도 없었다. 특히 부상, 사망자의 경우도 모두 포탄에 당한 것으로 이순신의 판옥선 함대는 마치 현대의 함대처럼 순수한 포격전으로 적을 무찔렀다. 특히 견내량은 마치 바다의 문경새재와 같은 지형으로 폭이 좁고 물살이 빨라 지협을 막아서는 전법으로 소수의 병력이 큰 병력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요새지인데 이순신장군은 이날 견내량을 내주고 대신 바다 한가운데에서 학익진을 벌려 적을 포위하여 인위적인 견내량을 만들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상과 같이 판옥선으로 이루어진 조선 수군은 한 척의 피해도 없이 일본수군을 무찔렀는데, 이는 판옥선의 성능을 단편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